76화. 부전여전 모전자전

by 지구인




자기 성격 아버님 닮았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제 알겠네.


내려가는 승강기 안에서 진원이 웃으며 말했다.


안 그럴 거 같은데 수 틀리면 들이받아버리는 거 말야. 말씀은 적으셔도 표정은 늘 온화하셔서 좀 무뚝뚝한 자기완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정말 비슷해. 재밌네.


그가 과장된 움직임까지 곁들어 말했으나 그의 연인은 웃지 않았다.


왜에. 난 괜찮다니까.


진원이 시은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시은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빠가 그렇게 나오실 줄은… 전혀 몰랐어.


시은은 문제의 영상의 일로 뒤집어졌던 그날의 부친을 떠올렸다. 모친만큼 혼내지는 않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그렇게까지 덮어놓고 자신의 편을 들어줄지는 몰랐었다. 또한 그가 안사람만큼 마냥 진원과의 혼인을 반기지는 않는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안사돈을 그 아들 앞에서 대놓고 겨냥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시은부는 자식들에게도 언성을 높힌 적이 거의 없었다. 아내에게는 가끔씩 그러했지만, 그 주요원인이었던 모친이 하세한 후에는 그마저도 사라졌었다. 그래서 여전히 할머니가, 그분이 맹목적으로 주던 애정이 그리우면서도 동시에 그분이 떠나시고 나자 비로소 찾아온 집안의 고요한 평화를 시은은 반겼었다.


괜찮아. 어머니가 훨씬, 자기한테 심하게 하셨을 텐데.


그거야…


시은이 말끝을 흐리자 진원이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나 정말 괜찮고, 자기한테 정말 미안해.


그제야 시은이 억지로 웃어 보였다.


둘은 손을 꼭 잡은 채로 진원의 자동차로 향했다. 아직도 날이 더워서 둘은 차에 올라 에어컨을 켜고 있어야만 했다.


내가 이나랑 그랬던 거 아버님이 아셨어 봐. 아버님은 안 그러시겠어. 그럼 나도 싫을 것 같아.


그거랑은 좀 다르잖아.


결국 딴짓이랄까 선을 넘을 뻔한 건 마찬가지지. 아버님 어쩌면 우리 어머니보다 더 하실지도 모르겠는데.


그 얘긴… 그 여자와의 일은 얘기할 필요 없어.


그 말씀도 드리려고 했는데 아버님이 그렇게 나오시는 바람에 당황해서… 미안해.


아니라니까.


진원이 시은을 빤히 보았다.


왜.


자기도 걱정되는 거 아냐? 나도 아버님 말씀 듣고 나니까 걱정되는데. 어머니가, 자기한테 더 많이 인사 오라거나 교회에 나오라고 하실 것도 같잖아.


응… 그럴지도. 어쩔 수 없지.


시은이 또다시 힘없이 웃으며 답하자 진원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자기도 그랬잖아. 요한이와의 일로 약점 잡혀 살고 싶진 않다고. 어머니께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아버님 말씀이 옳아. 그것까지 확실하게 해야 돼.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께 SOS 쳐야 할 거 같다.


…아버님은 정말 괜찮으신 거야?


시은의 걱정에 이번엔 진원이 조용히 웃었다.


아버지도 나랑 비슷한 게 아닐까 싶어. 상대가 요한이니까, 그 녀석이 좋다고 한 거니까 덮어주신 거 같아. 그것 때문에 요한이도 찾아가 만나셨는걸. 하랑이야 뭐… 그러니까 결국 어머니만 문제였는데 이젠 아버님도 문제네.


시은이 다시 울적한 얼굴이 되자 진원이 그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걱정 마. 잘 해결될 거야.


진원은 시은네 집을 벗어나며 곧바로 부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김원장은 아들을 위하여 단박에 상경했다. 그래서 진원이 예비 처이모들과, 호기심에 쫓아온 그 딸들 몇까지 모인 자리에 이른바 청일점으로서 탈탈 털리는 동안 그 부친은 바깥사돈과 마주했다.


김군… 김서방한테 다 들으셨습니까?


안사장이 조용히 묻자 김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옳으신 말씀이었습니다. 저도 내심 걱정되는데 사돈께서는 얼마나 그러셨겠습니까?


…형편이나 배움과 상관없이 자식에 대한 마음이야 다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믄요. 그러믄요.


사돈이 적극 동조해주자 시은부는 긴장이 좀 풀어졌다.


감히 상대도 안되게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이라 동년배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사돈을, 그것도 결혼식 전에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나마 눈빛만 봐도 드세 보이는 안사돈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안사장은 오직 아비로서 용기를 낸 것이었다.


…제가 못난 남편이어서 애엄마가 시집살이를 심하게 했습니다.


예에.


어설프게 효자노릇 한답시고 단 한 번도 아내 편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딸자식이 그러고 산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더라고요. 이것도 애엄마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자식이 더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예, 이해합니다. 저도 딸자식이 있으니까요.


김원장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겨우 스물인데 제 안사람은 벌써부터 시집갈 곳을 알아보고 다니지 뭡니까? 아이가 순해서 결국에는 제 엄마 뜻을 따를 것 같은데, 제 속마음은 사돈과 같습니다. 진원이 시은이처럼 만났으면 합니다. 제 처는 그저 좋은 자리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아이가 주눅 들지 않겠습니까? 저도 딸자식 둔 아비로서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마음 편한 게 제일이지요.


맞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다. 마음이 편해야지요!


안사장은 몹시 기뻐서 목소리를 높였다. 김원장이 다시금 미소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시은 아버님. 제가 제 자식 위해서라도 걱정하시는 바 확실하게 해결하겠습니다.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사돈께서는 제 마음을 알아주시네요.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아 안사장은 물을 마셨다.


똑같이 딸자식 둔 아버지 아닙니까? 이해하고 말고요. 저도… 제가 사죄드립니다.


뜻밖의 말에 안사장이 물잔을 내려놓고 김원장을 보았다. 아들과 닮았으나 훨씬 중후한 인상이 어느새 쓸쓸해져 있었다.


그 상대가… 아시겠지만 제가 데려다 키운 아이입니다. 진원이와는 쌍둥이처럼 친하구요. 그런데 그런 일이, 안 그러려고 해도 그렇게 됐다고…


아, 예…


딸자식 잘 키우셨습니다. 어떻게 우리 작은아들 놈까지, 제 두 아들이 다 반하게 만드셨습니까?


김원장이 짐짓 농담까지 하며 딸을 칭찬하자 안사장은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허허…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데야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 아이는, 그 가엾은 아이는…


김원장이 양아들의 몸에 있던 상처들을 떠올리며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괴로워하다… 그만, 자해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아이고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불편한 얘기니까… 안 했을 겁니다. 저도 진원이에게서 겨우 들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다 큰 사내자식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데 뭐라고 할 수가 없더라고요. 부디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김원장은 고개까지 깊이 숙여 보이며 용서를 구했다. 그제야 안사장은 사돈에게 자신과는 또 다른 자식 걱정이 있었음을 알았다. 자신의 자식 걱정만 하느라 마주 앉은 이의 아픔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 뒤늦게 면구스러워졌다.


예에, 알겠습니다. 그 일은 걱정 마세요. 그저 사부인의 일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사장도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김원장이 바깥사돈의 우려를 전하며 조심스레 부탁하자 정여사는 기가 찼다.


어이가 없어서 내가 정말! 보니까 그 딸내미 뻔뻔한 게 아버지 닮았구먼?! 별말없이 가만히 웃고만 있어서 돌부처스럽다 했더니 아이고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똑같네, 똑같아 누구랑!


진원이 피식 웃었다.


네, 어머니. 그건 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시은이랑 비슷한 데가 있으시더라고요.


정여사는 재밌다는 듯 웃기만 하는 아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당신도 딸이 있잖어요. 딸자식 둔 아버지라면 당연한 걱정이지요. 이왕 허락해주기로 한 거 확실하게, 흔쾌히 약속해주십시다. 사돈 말씀 듣고 보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내가 꼭 그러마 약속했어요. 그러니 당신도 약속해줘요.


아니 나도 뭐 볼 때마다 그럴 생각은 없지만, 애가 미운 짓하고 잘못하면 그 일이 절로 생각나는 건 인지상정 아니냐고요. 그러면서 한두 번 뭐라고 할 수도 있는 거지. 내가 이렇게 넘어가주는 것만도 감사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쪽 집에서는?


아이 그러지 말고 여보…


그만둬요. 기분 나빠 죽겠네. 기껏 큰맘먹고 허락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이건 무슨 구해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랑 똑같잖아. 그쪽에서 그렇게 나오면 나도 싫어. 흥, 이 결혼 파투 나면 누구 손핸데?!


어머니, 아버지 말씀대로 이왕 허락해주시기로 한 거 진심으로 받아들여주세요. 그래야 저도 어머니께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마음 없이 지낼 수 있지 않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이나와의 일로 시은이 아버님께 지속적으로 지적당하면 전들 좋겠어요? 어머니도 그건 싫으시잖아요.


얘, 그집 딸이 저지른 일이랑 그 일이랑 같니? 또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렇게 따지면 요한일 내가 데려왔고, 그래서 진원이랑 친형제처럼 자랐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미리 따로 인사했다가 그런 일이 생긴 거 아녜요. 우리 탓도 있겠지요.


뭐라고요?


아들마저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자 정여사는 다시금 혈압이 올랐다.


아이고 부자가 그냥 똑같이, 공부머리만 있지 순진해빠져선, 앞가림하는 덴 젬병이야 젬병! 그나마 내가 눈 부릅뜨고 있어서 엉뚱한 데 돈 안 까먹고 이 정도 사는 건 둘 다 알고 있어요?


부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이고오, 속터져속터져. 내가 제 명에 못 살아.


당신 판박이잖아요.


김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뭐가요!


정여사가 성을 냈으나 그 남편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 부모 반대에도 끝내 결혼하겠다고 우기는 거… 35년 전 당신이랑 똑같잖아. 가출까지 해서 내 자취방으로 무작정 들이닥쳐놓고는. 모전자전이구만 뭘.


예?


진원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부모님은 선자리에서 만나 곧 결혼했으나 그 과정에서 외조부가 귀향을 고집한 아버지를 못마땅해하셨다는 정도로만 외조모께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진원남매가 물어보면 정여사는 둘이 좋아했으니까 결혼했지, 라고만 대답하고 말았고 김원장은 엄마가 부잣집 아가씨여서 쉽진 않았지만, 이라고 웃으며 덧붙였을 뿐이었다.


장모님이 전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결혼도 힘들었어요. 아니에요?


당신은 언제적 얘기를!


정여사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당신도 장인어른 말씀 안 따르고 고집 피워서 결국 뜻대로 했잖아요. 그래도 우리 잘 살아왔잖아요. 그러니 당신도 양보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요.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혹시 그래도 억울하면 나중에 진원이도 똑같이 당해보라고 하든지요.


여봇!!


아버지, 더 얘기해주세요. 어머니가 어쩌셨다구요?


진원은 어머니의 약점을 알게 된 것보다도 부모님의 몰랐던 연애 이야기가 궁금하여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 한마디만 더 해봐요! 나 진짜 식장에 안 나갈라니까!


정여사는 빠르게 내지르고는 도망치듯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아버지…


더는 알려고 하지 마라. 네 어머니 여자로서 자존심이 있지 않겠니.


김원장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차암… 사돈 말씀이 맞다. 아내보다는 자식이 먼저라며 어쩔 수 없다더니 나도 별수없구나. 이 정도면 사돈댁에 면이 서겠지?


그는 조용히 웃어 보이고 아내가 있는 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동안에는 단 한 번도 먼저 입밖에 내지 않고 없었던 일로 쳤던 과거지사를 아들 앞에서 폭로했으니 서슬 퍼런 마나님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또한 여자로서 부끄럽고 섭섭하여 그 옛날처럼 서럽게 울고 있을 것이다. 김원장은 오는 겨울에는 아내가 그토록 원하던 따뜻한 휴양지로의 해외여행을 가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옮겼다.


진원은 자신의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 돌아가고 있는 부친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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