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딸자식 둔 아버지 마음

by 지구인



정여사는 헐레벌떡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아들에게 눈을 흘기며 혀를 찼으나 별말은 하지 않았다. 잠을 설쳤다며 뒷좌석으로 가 줄곧 눈을 감고 있던 그이는 집에 도착해서야 어차피 결혼할 거라면 날짜는 괜히 왜 미뤄. 그냥 해. 자동차 문을 열어주는 아들에게 내뱉듯 말했다.


돌아가는 판세가 정여사에게는 불리하기만 했다. 결론은 일찌감치 정해졌었다. 물론 진원이 그 야시시한 이나에게 넘어가 남사스러운 짓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이 정도로 넘기진 않았을 것이고, 또 그 부뚜막에 올라간 얌전한 고양이 같은 시은이 술에 기대어 연인에게 달려가 밤을 보내지만 않았어도 또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결론에 괜한 고집을 피워 사람들 입방아에 오를 필요는 없었으므로, 코앞에 닥친 결혼식을 미룰 이유도 없었다.


아들의 쇠고집이야 익히 알고 있는 바고, 그래도 이 일로써 아들의 돌아섰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게 만든 게 어차피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에야 그나마 잘된 일이라고 정여사는 생각했다. 어떻게 낳은 아들이고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정여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식을 버릴 수 없었다. 다 가질 순 없는 법이다. 돌아간 친정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정여사도 입술을 깨물며 되뇌었던 것이다.


어쨌든 아들 내외는 자신에게 꼬투리를 잡힌 형국이다. 그리고 아무리 용서를 했더라도 진원의 요한에 대한 마음이 예전과 똑같진 않을 것이므로, 적어도 완전히 회복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확률이 높았으므로 정여사는 그럭저럭 졌지만 잘 싸웠다, 정도로 물러서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원은 마침내 마음의 짐을 덜고 값비싼 과일이며 생선이며 소고기를 바리바리 싸들고 웃는 낯으로 처가를 방문하여 결혼식 직전 명절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웬걸,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장인어른이 될 시은의 아버지 안사장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대신 무뚝뚝한 딸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은이 쓰러졌던 날 급히 방문했던 그날밤보다도 더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어서 진원은 처음 인사드리러 왔을 때보다도 더 긴장하여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왜 그래, 편히 앉아. 한여사가 말했지만 괜찮습니다 어머님. 진원은 한사코 사양했다.


거실 소파를 등지고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사윗감의 이야기를, 감탄의 추임새를 곁들이며 즐거이 듣는 아내와는 달리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듣고만 있던 시은부가 갑작스러운 추궁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다 자네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는 거잖아.


예?


진원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시은과 그 모친도 눈이 동그래져서 안사장을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은부는 단단히 준비해온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한솥밥 먹으며 10년이나 살았던 그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라는 청년이 우리 시은이한테 반해서 쫓아다녀서 이 사달이 났다는 말이잖아. 우리 시은이는 그 뭣이냐, 영상에서 찍힌 것도 그 남자가 하도 쫓아다니니까, 또 자네 말에 따르면 그런 불쌍한 사연이 있다고 하니 우리 착한 시은이가 남자가 너무 가여워서 거절하지 못하고 그랬다는 말 아니냐고.


예…


진원의 고개가 절로 떨구어졌다.


그런데도 자네 어머니는 계속 우리 아이 탓만 하시고,


아이 뭐 설령 그렇다고 해도 거절할 수도 있었지. 뿌리쳤어야지!


한여사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영상까지 찍혔는데 어떤 아들 엄마가 그래요. 우리 재영이가 같은 일 겪었어도 나도 그랬을 거야. 나도 그 여자애 머리끄댕이 잡았지. 결혼 못한다고 그러지. 그래도 넘어가주신다고 하잖아요. 그랬으면 된 거지.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가 지금 김군과 얘기하고 있잖아.


안사장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말했다. 진원은 등줄기에 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자네 절친이라는 남자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진 건데, 그런데도 자네 어머니는 마지못해 허락하셨다는 얘기 아닌가. 앞으로 그 일로 자네 어머니가 우리 아이 괴롭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 있어. 그 약속은 받아왔나?


진원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진땀이 난 적이 없었다.


그저 허락한다니까 넙죽 엎드렸겠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생각도 안 하고 그저 결혼 원래대로 할 수 있다는 것만에 자네는 기뻐서 달려온 게 아닌가 말이야.


예에, 제가 어머니께 마음으로부터 기꺼이 받아달라고 말씀드렸고, 어머니도 그에 대해 별말씀은 없으셨지만…


그러니까 앞으로 그 일을 기화로 우리 아이 조금이라도 괴롭히지 않겠다, 그런 뭐 각서라든지 받아왔다는 얘긴 아니지 않냐 이 말이야. 자넨 법일한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허술한가. 아직은 햇병아리라고 해도 우리나라 최고 대학 나와서 시험도 금방 통과했다는 사람이 뭐 그렇게 어설퍼.


안사장은 여전히 조용조용 말했지만 눈빛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시은모녀도 지금껏 본 적 없는 서슬 퍼런 가장의 모습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가 어머니께 그런 약속은 받아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니가 그렇게까지는…


이제 와 하는 얘기지만 자네 어머니 처음부터 우리 아이 탐탁지 않게 보지 않은 거 말일세. 물론 그 입장에서 그럴 수 있어. 그래도 자네가 우리 딸이 좋다고 쫓아다닌 거 아니었냐고.


맞습니다.


그런데도 자네 어머니는 영 곱게 봐주시지 않았지. 잘난 아들 둔 어머니 마음에 그럴 수도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그동안은 나도 그냥 참았어. 그런데 이런 일까지 생기고 나니 걱정이 앞서네. 우리 시은이도 부모만 좀 더 잘 만났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해준 거 없는데도 제법 괜찮은 대학에도 한 번에 가고 공무원 시험도 한 번에 붙고, 다 자기가 알아서 했단 말이네. 자네와 달리 대학도 못 나온 부모 밑에서, 그렇게까지 제가 알아 하기는 절대 쉽지 않단 말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네 어머니는 우리 시은일 높게 평가해주지는 못할 망정, 그저 먹고살기 바빠서 제대로 보살펴주지도 못한 부모 밑에서 대견하다 하지는 못할 망정, 그래도 그 와중에도 제 엄마 성화로 할 도리는 알 만큼은 아는 것에도 감사하실 줄도 모르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진원 역시 절실히 느껴온 바였으므로 그는 어머니를 위하여 변명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런 일까지 생겨버렸으니 이젠 확실하게 말해야겠네. 자네 어머니 앞으로 이 일을 기화로 조금이라도 우리 딸 괴롭게 하면 나 가만히 있지 않을 거네. 그러니 약속받아와야겠네. 각서라도 받아와. 그렇지 않고서는 나 이 결혼 허락 못해.


진원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보다 못한 시은이 나섰다.


아빠 왜 그래요? 저희 둘이 합의한 일이고 아마 어머님도 그러지 않으실 거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제가 감내해야 될 일이잖아요.


너 지금이야 그렇지,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했어. 너 너희 엄마 보고도 너희 할머니 겪고도 네 일 아니다 이거냐? 내가 못나서 네 엄마 고생시켰다만 내 딸은 그렇게 사는 거 못 본다.


안사장은 도리어 딸에게 언성을 높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원이 입을 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버님. 제가 일 확실히 매듭짓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렇지 않거든 다신 오지도 마.


예, 알겠습니다.


시은부는 벌떡 일어나서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시은이 엉거주춤 일어난 진원에게 민망하여 미안하다고 속삭이고 진원은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하는 동안 시은모는 남편을 쫓아 방으로 들어갔다.


미쳤어요? 왜 판을 또 뒤집으려고 해요?


아내가 다가와 속삭이자 남편은 무표정한 얼굴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며 대꾸했다.


당신이 내내 그랬잖아. 돈은 벌면 된다고 어떻게든 하면 된다고 마음 편한 게 제일이라고 하지 않았어? 당신 그렇게 살았으면서 당신 딸도 그렇게 사는 꼴 보고 싶어.


아니 시대가 변했고 나처럼 모시고 사는 것도 아니고 멀리 떨어져 살고, 기껏해야 1년에 몇 번 보는 게 다일 텐데 그 정도야 뭐 시은이 말처럼 참고 넘어가야지 그럼 어떡해?


그 몇 번이라도 나는 싫다고. 죽어도 싫어.


아이고 참 갑자기 왜 저래. 그 알량한 자존심 참 이상한 데다 뻗대시는구려.


이상하거나 말거나 난 그래. 명심해.


안사장은 다짐하듯 말하고는 다시 평소처럼 입을 닫고 낚시채널에 눈길을 주었다. 한여사는 뭐라 하려다가 숨을 내쉬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시은의 인도로 소파에 앉아 있던 진원이 한여사를 보고 일어섰다. 손짓으로 앉으라고 하면서 한여사가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아이고 김서방 미안해. 근데 부모 마음으로선 저럴 수도 있어. 자네 어머님이 자네 아까운 게 부모 마음인 것처럼 저 양반이 그러는 것도 부모 마음이거든.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버님 말씀이 옳으신데요. 저희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하실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또 모르니까요. 제가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아유 아니라니까. 아이고 참 결혼 허락해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그런 조건까지 내세우면은 괜히 또 동티 나지. 입도 뻥긋하지 마. 저 양반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는 그냥 어머니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조용히 결혼하라고. 너도.


한여사가 남편을 의식하여 목소리를 낮추어 딸 커플에게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내일 점심에 네 이모들 오기로 했는데 저 양반이 저러고 있으니 어쩌냐… 미뤄야겠지?


한여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카사윗감 얼굴 좀 보자고 아우성치는 언니들에게, 잘나고 바쁜 우리 김서방은 명절 연휴에나 시간이 날 거라며 미루고 미뤄온 만남이었다. 가장 친한 바로 윗언니는 그 딸자식들이 가자고 하는 여행도 마다하고 시간을 비워뒀었다.


혹시 밖에서 만나뵙는 건… 아버님께 너무 실례일까요?


진원이 조심스레 말하자 한여사의 눈이 빛났다.


아 그래, 그러면 되겠다. 설마 그거까지 뭐라 하진 않겠지.


저희가 모실 만한 곳 찾아보겠습니다, 어머님.


진원이 웃으며 말하자 한여사는 사윗감이 새삼 뿌듯하여 그의 등을 두드렸다.


아이고 머리도 좋고 붙임성도 좋고, 우리 김서방이 최고야. 내가 얼마나 고맙고 기쁜지 말로 다 못해. 저 양반 저러는 거 민망하긴 하네만, 부족한 부모라도 자식 생각하는 마음까지 부족하진 않아. 따지고 보면 저 양반 말들, 틀린 말도 아니고.


예에, 압니다. 당연히 하실 말씀이세요. 전 괜찮습니다. 이제 저도 자식인데 마음속 말씀 편하게 하셔야지요. 혹시 아버님이 저 어려워하시나 하기도 했는데 제가 착각하고 있었네요. 제가 오만했었습니다.


진원은 또다시 자신의 우월감을 지적당한 기분이어서 부끄러웠다. 스스로 별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조차 오만함의 일종이지 않겠는가. 그날 옥상에서 요한에게서, 이날 처가에서 장인에게서, 진원은 앞으로 살아가며 잊지 말아야 할 지침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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