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잠이 깬 것은 시은이었다.
스탠드의 은은한 불빛에 의지하여 시은은 옆에 잠들어 있는 진원을 보았다. 터질 것 같은 심장박동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는 동시에 잠들기 전의 일이 모조리 기억났다. 시은은 다시금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은 뒤 진원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깼어? 몇 시지?
진원이 다 떠지지 않은 눈으로 휴대폰을 보았다. 두어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은 얕은 밤이었다. 진원이 일어나 앉았다.
어머니와 통화한 거… 기억해?
응.
흐흐, 할 말 못할 말 다 하던데. 용감하게도.
말렸어야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계속 몰아치던걸 뭐.
자기 지금 웃음이 나와?
시은의 타박에 진원이 웃음을 그치고 연인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자기 술 깬 거지. 그럼 정식으로 말해줘. 정말 나에게 돌아오는 거야? 우리 괜찮은 거야?
시은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진원은 기다렸다.
…자기만 괜찮다면, 자기만 용서해준다면 나 자기한테 돌아가고 싶어.
진원이 안도감으로 미소했다.
이미 내가 부탁한 거잖아. 내 허락을 구할 필욘 없어.
그래도…
고마워. 이렇게 와줘서, 내게 달려와줘서.
내가 하고 싶어서, 자기 보고 싶어서 온 거야.
그래, 그래서 더 고마워.
사랑해.
진원이 놀란 얼굴로 시은을 보았다. 그러나 화자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청자를 똑바로 보며 다시 힘주어 고백했다.
사랑해.
진원이 넋이 나간 듯 있자 시은은 두 손을 들어 그의 양볼을 감싸안으며 숨겨왔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랑해.
…그 말 자기가 먼저 한 거 처음인 거, 알아?
시은이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나 그 녀석한테도 감사해야 하는 거야? 그 일 없었더라면 자기가 이러진 않았을 거 같은데.
그랬을지도.
시은이 담담히 말했다.
그 사람 분명 마음에 걸리고 내 마음 한구석에 들어온 것도 사실이지만 자기와는 비교할 수가 없어. 그 사람 행복하길 원해. 좋은 여자 만나길 바래. 연주라도 괜찮아. 근데 자긴 다른 여자한테 못 주겠어. 그 차이가 있단 걸 알았어.
진원이 벅찬 표정으로 시은의 손을 잡았다.
진작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면 자긴 더 나를 놓지 못할까 봐, 내 딴엔 자길 위해서 말 안 했었어.
그래그래, 고마워. 이제 다 됐어.
진원이 시은을 품에 안았다.
이제 어머니만 설득하면 돼. 자기 아까 나랑 같이 무릎 꿇고서라도 빌겠다고 했어. 기억나?
응. 걱정 마. 이젠 도망치지 않아.
그래.
진원이 힘을 주어 시은을 안아주고는 몸을 떼어 방바닥을 딛고 섰다.
이제 그만 가자. 자기 어머님 전화 주셨었어.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바래다주겠다고 했어.
정말 나 보내고 싶어? 이대로 그냥 보낼 거야?
침대에 그대로 앉은 채 시은이 진원을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 술 다 깼어. 그리고 자기랑 있고 싶어. 싫어?
나야, 내가 더 그러고 싶지. 하지만 늦게라도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그리고 또 우리 어머니께도…
자기랑 있겠다고 하면 엄만 오히려 좋아할걸. 내가 전화할게.
시은은 술이 깼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이 너무도 씩씩하고 당당했다.
엄마, 나 술은 다 깼는데 자고 갈 거예요. 기다리지 말라고. 응, 진원 씬 가라는데 내가 있고 싶어서 그래요. 끊어요.
마치 승전보라도 전하듯 모친에게 외박을 통보한 시은은 전화기를 꺼버리고는 침실 안 욕실로 들어갔다. 용변 보는 소리를 가리기 위해서였을 세면대의 세찬 물소리가 그치더니 그 다음엔 샤워기 물소리가 진원의 귀에 들려왔다.
진원이 거실 화장실을 사용하고 돌아오고 나서도 물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아 진원이 노크하려 했을 때 물소리가 그쳤다. 잠시 후 커다란 타월을 몸에 두른 시은이 경직된 얼굴과 어색한 발걸음으로 나왔다.
진원이 시은을 바로 껴안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 팔짱을 끼고 파우더룸 입구에 선 채로, 맘 변했어도 괜찮아, 라고 말했다. 시은이 말없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술이 다 깨버린 탓에 이미 저지른 일과 앞으로 하겠다고 한 짓에 대한 부끄러움에 몸을 씻는다기보다 그저 물줄기에 몸을 내맡기면서, 시은은 그냥 옷을 챙겨입고 나가서 집에 돌아갈까 고민도 했다. 그러나 곧 진원에게 한 말을 스스로에게 했다. 이젠 도망치지 않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왔건만, 예전처럼 나오자마자 자신을 끌어안을 진원을 기대했건만, 그는 쓸데없이 신중했다. 시은이 그를 안으며 말했다. 각서라도 쓸까? 그제야 진원이 시은의 드러난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이젠 늦었어. 내가 안 보내줄 거야. 시은이 그에게 두른 팔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응, 절대 놓지 마.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밤을 다투어 서로의 몸을 으스러지도록 안고 안고 또 안았다. 둘 사이에 다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도록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두 남녀는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둘 사이 짧은 헤어짐의 원인이었던 미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치 그동안 못했던 것을 벌충하듯 열렬히 사랑을 나누는 동안, 두 연인은 그를 전혀 떠올리지 않았다. 사이사이 격정이 잦아들고 고요가 깃들 때에도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만을 바라보고 서로만을 생각하고 서로만을 욕망했다. 조금의 의심도 약간의 걱정도 없이 그러했으므로 둘은 허심탄회하게 그 아름답고 불운한 청년을 말할 수 있었다.
진원은 그날 옥상에서 요한이 했던 말들과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시은에게 낱낱이 털어놓았다. 오직 그녀에게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이상하지. 상대가 요한이라서 미칠 것 같았는데 또 상대가 놈이라서… 이해가 돼. 용서가 돼. 다른 남자였다면… 아무리 자길 사랑해도 용서 못했을 거 같아. 이건 어떤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아.
그래, 사랑이니까. 사랑엔 논리는 필요 없어.
진원이 빤히 보자 시은이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야? 자기의 요한 씨에 대한 그런 마음은, 사랑 아니야? 그 사람은 자길 사랑한다고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나한테 말했는데.
다시 한 번 말해두는데 난 어디까지나 형제애로써야. 오해 없길 바래. 난 여자, 처음부터 여자로 태어났고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헤테로인 여자가 좋아. 존중해주세요.
풋.
정말 이상하지. 녀석에게는 그냥… 너그러워져.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해주고 싶어.
응, 자기만큼은 아니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겠지만 나도… 그 사람에게라면 자길 양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마음이야.
설마 그 자식이 말한 것 같이 그러는 건 아니지?
뭐가.
녀석이랑 나랑 그… 성적으로 말이야.
진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자 시은은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둘만 좋다면야 뭐 어쩌겠어. 내가 양보해야지.
아니라니깐 왜 자꾸! 그렇잖아도 그때 한정식집에서 얘기 들은 후에 나 좀 그래. 녀석 보기가 좀… 그동안 내가 어깨만 둘러도 정색했던 게 혹시 그런 마음 때문인가 싶어서 식겁했다고.
진원의 다급한 해명에 시은은 또다시 소리내어 웃은 뒤 말했다.
그 사람도 성적인 것보단… 자기 옆에 가장 친밀한 사이로 있고 싶은 거라고 했어. 대체 왜 둘이 남녀이거나 성적으로 끌리게 안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이 모든 분란이나 소동도 없었어도 됐잖아. 난 그냥 전처럼 평범하고 지루하게 살면서 자극적인 창작물들이나 섭렵하면서 그냥저냥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마음고생할 필요도 없이.
와, 너무한데. 나는 자기 만난 후로 자기 없는 삶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자긴 빠져나갈 궁릴 하는 거야?
진원이 괜스레 호들갑스럽게 말해보았지만 시은은 풀이 죽었다.
응. 미안하지만 그래. 근데 어떡해. 이게 난데. 이런 나라서 미안해.
진원이 웃으며 시은을 끌어안았다.
아냐, 괜히 그래본 거야. 하여간 고지식하기는. 그래도 그런 자기가 좋아. 결혼생활이란 결국, 그런 보수성으로 지켜나가는 거니까.
…또 그런 일 생기면 어떡해.
요한이 같은, 그런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남자가 또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있으면 좋겠다.
뭐라고?
자긴 뭐 안 그래? 강이난가 하는 여자같이, 섹시한 여자가 자기 좋다고 덤벼들면 안 좋겠나 뭐. 좋았잖아.
…술만 안 마시면 돼. 정줄 꽉 붙잡고 있으면 괜찮아.
와, 아니라고는 안 하네?
시은이 몸을 세워 앉으며 목소리까지 높였으나 진원은 동요하지 않았다.
전과가 있으니 어떡해. 과걸 없앨 수도 없고. 다만 그를 반면교사 삼아 노력할 수밖에. 아니야?
…치, 할 말 없네.
시은이 다시금 진원과 키를 맞추어 누웠다. 진원이 웃으며 몸을 돌려 시은을 끌어안았다. 그에게 안겨 그의 탄탄한 등을 어루만지던 시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야.
응.
나 허락 맡을 일 있어.
뭐가.
시은이 다시금 이불로 가슴을 가린 채 앉으며 진원을 내려다보았다.
그 사람… 요한 씨 만나고 싶어. 단 둘이, 아마도 마지막으로.
진원도 벗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왜.
나 비겁하게도, 그 사람한테 아니라고 확실히 말 못했어. 물론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그런 거라고 연주나 사장님 앞에서 날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해줬지만, 난 그렇다고도 자신 있게 말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아니라고도 하지 못했어. 아니 물론 자기 본가에 내려가 카페에서 만났을 때는 말했지만 그렇게 말해놓고서는… 그 영상에 찍힌 일이 있었던 거라… 확실히 해두고 싶어. 그래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셋이 만나도 나 떳떳할 수 있을 거 같아. 하지만 자기가 싫다면 안 할게. 지금 당장 답 안 해줘도 돼.
내가 함께 있으면…
아니. 이건 내 일이야. 도저히 날 못 믿겠어서 허락 못하겠으면 차라리 안 만나고 말래. 그래도… 부탁해.
아직도 녀석이 자기한테 미련 있는 거라면… 괜히 또…
이 말 들으면 자긴 또 이해가 안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들어볼래?
뭔데.
그 사람이 좋아한 건 내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결혼할 만큼 사랑한 여자라는 가설. 자길 너무도 좋아하고 동경해서, 자기와 일종의… 동기화 같은 게 된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구였대도, 자기가 결혼하겠다고 소개한 여자한테라면 끌렸을 거라는. 물론 요한 씨도 의도한 게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지. 내가 아닌 다른 누구였대도 자기랑 결혼하겠다는 여자였다면 뒷조사했을 것처럼.
아 나는… 자기 말대로 이해가 안되네.
시은은 살포시 웃었다.
어머님이 그러시더라. 자기랑 그 사람은 아기 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그렇게 눈을 못 떼고 좋아했다고.
응.
그 얘기랑 요한 씨가 나한테 했던 말들이랑… 또 그 사람이 옥상에서 자기한테 했다는 말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본 거야. 물론 이게 절대적으로 옳다는 건 아니야. 근데 난,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졌어. 요한 씨한테도 이렇게 말할 거야. 말하고 싶어. 그 사람도 결국은 동의할 것만 같아. 그러면 그 사람도 내게 가졌던 마음이든 욕망이든… 정리할 수 있게 되겠지.
자기 말이 맞다고 해도 내 옆에 있는 게 자기라는 건, 그 녀석이 마음에 품은 대상이 자기라는 건 달라지지 않잖아.
그렇더라도 내가 함께… 평생토록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야. 그 누구에게라도 떳떳이 말할 수 있어. 어머님께도 그랬잖아. 근데 가장 확실히 말해주어야 할 사람은… 그 사람이잖아.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대체적으로는 동의해. 근데 지금 당장은 답 못하겠다.
응.
시은이 빙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그녀의 말처럼 마음 편해 보여서, 정말이지 요한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완벽히 자신에게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으므로 진원은 감격한 나머지 그녀의 요청을 허락할 뻔했다. 대신에 그 충동을, 젊고 건강한 그는 육신에의 그것으로 빠르게 치환하여 성공적으로 위기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