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뜻이야.
진원이 선 채로 되물었으나 시은은 양손으로 두 볼을 감싸고 눈과 입을 동그랗게 하고서는 답이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바로 끌어안고 볼을 깨물고 싶은 것을 진원은 겨우 참았다.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그러나 시은은 나 마실 거 좀 줘, 라고 말했다.
…그래.
진원이 주방으로 가 정수기로부터 머그잔에 얼음물을 담고 자신을 위해서는 새로운 맥주캔의 뚜껑을 따서 가져왔으나 시은이 술을 뺏어갔다. 진원은 놀라서 말리지도 못했다. 탁, 소리를 내어 절반은 비운 캔을 소파테이블에 내려놓고 마초라도 된 양 거칠게 입가를 훔쳐낸 뒤 시은이 말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지난번에 바로 여기서 못했던 거, 마저 하고 싶어.
다시금 술기운을 빌려 시은은 진원을 껴안았으나
잠깐잠깐. 자기 취했잖아.
그에게 밀어내졌다.
바보. 나더러 맨정신으로 이런 말 하란 거야? 아님 하기 싫단 거야.
자기야말로 바보같이.
진원이 어이없어했다.
잊었어, 내가 목매다시피 해서 해온 거? …그날 말고는.
진원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시은도 언짢아졌다.
목매서 했단 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래 좀 과장했지. 어쨌든 자기가 이러는 건 그날, 오피스텔에 갑자기 찾아왔던 그날하고 오늘이 두 번째잖아. 아니야?
그래서, 싫다고?
그게 아니라,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조심스럽다고.
진원이 여전히 수비적으로 나오자 시은은 수치스러워 그만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다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어어, 조심해! 그가 붙잡아준 손길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시은은 이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때 진원의 전화가 울렸다.
잠깐만 시은아. 그가 주방 아일랜드 식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들고 미처 챙기지 못했던 맥주 등을 봉지째로 냉장고에 밀어넣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의 어머니였다.
- 집이니?
예. 내일 새벽같이 내려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 그럼 안시은이도 같이 있니.
정여사의 목소리는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네, 집으로 찾아왔네요.
- 뭐라디. 아니 걔 좀 바꿔봐라.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중간에 일어나서 가버린다니?
들었습니다. 근데 이유도 아시잖아요. 저희 둘 마음, 다시 확인했어요.
- 내가 가래 네가 올래? 아니 내가 가야겠다. 너희 둘이 거기 있다니 삼자대면하자.
어머니.
그때 시은이 소파에서 진원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어머니께 말씀드릴래?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여사는 그래, 스피커폰 해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어디 들어나보자. 퉁명스럽게 답했다. 진원이 전화기를 소파테이블에 놓고 시은의 옆에 다시 앉자 시은이 누가 들어도 술에 취한 발성으로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 저 안시은입니다. 어무님 며느립니닷.
- 누구 마음대로?!
네에… 그래두 죄송하지만! 어머님 며느리 해야겠습니다. 받아주세요. 받아주셔야겠슴다.
- 뭐야, 너 취했니?
네에. 맨정신으로 진원 씨 보기 좀 그래서,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방금 또 마셨어요. 제가 술찔이라, 엄청 알딸딸하네요, 흐흣.
시은아.
진원이 놀라서 속삭였으나 전에 없이 취한 시은은 겁을 상실했다.
어머님!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아~ 저 어무니 아들 사랑하고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허락해주셔야겠어요!
- 얘!
그러나 시은은 마치 미국인처럼 소란스러운 손짓까지 하며 말을 이어갔다.
제 말 안 끝났어요! 그날 어머니 찾아가서 요한 씨, 그 사람에 대해 물어봤던 거는, 변명 같지만 조금이라도 그 사람 떼어낼 뭐가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거예요. 근데 얘기 듣고 보니 그 사람이 너무 불쌍했어요. 어머님이 넘 심하셨잖아욧?! 그래서 그 일이, 어머님이 영상으로 봤던 그 일이! 일어난 거 같습니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때뿐이고 그 뒤론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어요! 그러니 봐주세요.
시은이 술에 기대어 정여사 면전에서는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거침없이 늘어놓자 진원은 그저 웃으며 연인을 바라보았다.
- 얘얘얘 말하는 것 좀 봐.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네!
네에 어머님! 뻔뻔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진원 씨 포기 못합니다. 진원 씬 제 거니까, 앞으론 어머님 아들이 아니라 제 남자니까! 어머님이 포기해주세요. 죄송합니닥!
그렇게 호기롭게 외친 뒤 시은은 아예 전화기까지 꺼버리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털썩 누웠다.
시은아!
진원이 놀라고 또 감탄하여 부르자 이름의 주인은 좀 전보다 더 풀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나 취했나 봐.
그래, 자기 정말 취했다. 근데 좀 감동인데?
진원이 웃으며 말하자 시은이 그에게 다시금 안겨들었다.
그럼 안아줘. 키스해줘.
자기야, 심장이 너무 뛰잖아. 맥박이 나한테도 느껴질 정도야. 안되겠다, 좀 눕자. 침대로 갈래? …내 말 들려?
그러나 시은은 이젠 눈조차 뜨지 못했다. 그나마 입술은 움직였다.
안되는데… 나 자고 일어남 술 다 깨서 또 부끄러워질 거 같은데… 지금… 해야 하는데…
시은의 고개가 풀썩 꺾였다.
진원이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으나 시은은 잠이 든 것 같았다. 아이고 이 주정뱅이… 웃으며 시은을 품에 안고 그녀의 팔을 쓰다듬으며, 진원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었던 시은이었기에 걱정되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기뻤다. 결혼하면 이런 모습을 스스럼없이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모습까지 감싸 안아주는 게 부부가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술기운을 빌렸더라도 시은의 마음이 굳건한 것을 진원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은을 더욱 꼭 껴안고 뜨거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후 그녀를 침대에 눕혀주고자 안아올리려 했을 때 시은의 전화기가 그녀의 가방 속에서 진동했다. 진원이 전화기를 보니 어머님, 이라는 호칭의 발신자였다.
네, 어머니.
- 너 다시 전화 안 켜고 뭐하는 거니?
아, 시은이가 그새 잠이 들어서 침대로 데려가 눕히려는 중입니다. 그래서 깜빡했어요.
- 뭐? 그럼 오늘밤 함께 보내겠단 거니?
시은이가 깨고 봐야겠지만 시은이가 원한다면 그럴 생각인데요. 설마 쳐들어오실 건 아니죠?
진원은 연인에게 감복한 나머지 전에 없던 능청을 떨었다.
- 세상에나…
하랑이한테도 말씀 안 하시고 올라오신 거죠? 이러려고 그러셨어요?
진원이 웃음기 대신 원망을 섞어 물었다.
- 나한테 뭐라 하지 마라. 추석이 코앞인데 넌 계속 그렇게 밍기적거리고 있지, 하랑이도 이젠 백프로 믿을 수가 없지, 네 아버지야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사면초가가 따로 없잖니! 걔가 뭐라 했는지 모르겠다만 나 별말 안 했다!
네에,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용기가 나서 달려왔다더군요. 그럴 의도는 아니셨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감사합니다.
- 세상에 부창부수라더니, 뻔뻔한 것도 똑같네?!
그 말씀은 저희 인정하신단 걸로 들리는데요. 저희 청첩장 돌려도 되는 거죠?
진원은 다시금 능구렁이같이 굴었다.
- 인정은 누가!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 됐고, 내일 같이 내려가자. 나 XXXX호텔에 있으니까 내일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거기로 와.
…알겠습니다. 최대한 맞춰볼게요.
- 왜. 늦을 수도 있단 거니? 걔랑 잠자리하느라?
어머니.
진원이 정곡을 찔려 얼굴을 붉혔다.
- 노파심으로 말하는데, 너 술 먹지 마라. 너 술기운에 이나한테도 그랬던 거 아니야? 점잖은 아버지 안 닮고 어디서… 그런 건 사내 티 내지 마라. 격 떨어져.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
- 그래. 난 내 남편도 아들도 나중엔 사위도 다 똑같이 나무랄 데 없는 신사였음 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 그래 알았다.
모친과의 통화를 마치고 진원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정여사의 말에 진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이의 지적처럼 감정적으로도 혼란스러운 배경이 있었다 해도 어쨌든 술기운에 옛 연인의 유혹에 넘어갈 뻔했고, 그전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정혼녀를 범할 뻔하지 않았던가. 방금에는 그 두 가지 사건이 혼재되어 후자의 상대가 전자처럼 행동하는 격이었다. 어쩌면 또다시 시험에 든 것인지도 몰랐다.
진원은 복잡한 감정으로 잠든 연인을 보았다. 시은은 입을 벌린 채 침까지 흘리며 잠에 빠져 있었다. 흡사 출근이라도 하듯 무더운 날씨에도 야무지게 여민 옷깃에 긴 바지로 하체를 가린 옷차림은, 가슴이 깊게 파인 것도 모자라 몸에 달라붙는 짧은 원피스를 입었던 그날의 이나와는 너무도 달라서 진원은 괜한 웃음이 났다.
그 와중에도 시은의 얼굴은 물론이고 목과 팔까지, 샌들을 신었던 맨발까지도 모두 가을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시은을 소중히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축 늘어진 몸인데도 무겁지 않았다. 그동안의 마음고생 탓이리라. 진원은 가슴이 아팠다.
시은을 침대에 눕히고 약하게 냉방을 켠 뒤 조심조심 방문을 닫고 진원은 거실로 다시 나왔다. 시은의 전화기가 소파테이블 위에서 다시 진동하고 있었다. 이번엔 그녀의 어머니였다.
예, 어머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 김서방인가?
예.
- 같이 있어.
예.
- 그러면은…
한여사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네, 어머님. 저희 화해했습니다. 제가 먼저 그러자 했었고 오늘, 마침내 시은이가 제 집에 찾아와 자길 받아달라고 했습니다.
- 정말인가?
예. 그런데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급히 마시고 왔더라고요. 지금은 취해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일어나면 데려다주겠습니다.
- 자네, 자넨 그러면… 얘기 다 들었네. 상대가 누군지도 다 들었는데… 그래도 용서했단 거야?
한여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예, 어머님. 혹시 그날 이후로, 제가 밤늦게 시은이 찾아갔던 거 아세요?
- 응.
저는…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시간 많이 걸리지 않고 용서했었습니다. 근데 시은이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좀 답답한 거 아시잖아요. 그래서 제게 헤어지자 했었습니다. 그 후에 제가 시은일 찾아가 다시 시작하자 했던 거고, 죄송하지만 오늘 제 어머니도 시은일 불러내셨습니다. 아, 심하게는 안 하셨다고 합니다. 시은인 오히려 절 놓치지 않고 싶은 마음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 그러면 그쪽 어른들은…
네, 아버진 괜찮으시고 어머니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반가워하진 않으십니다. 하지만 제가 이번에 내려가서 담판을 짓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혹시 저희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시면 결혼식이 좀 미뤄질 수도 있겠습니다.
- 아이고 그 정도야 어쩔 수 없지. 그래, 그래도 괜찮네. 괜찮아.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사부인 허락도 없이 밀어붙일 순 없지. 괜찮고 말고. 내가 미안하네. 고맙고.
아닙니다, 어머님. 어머님이야말로 마음고생 많으셨죠. 죄송합니다.
- 나야 뭐…
한여사가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가 진원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또한 그분이 만들어주고 챙겨 보내준 정성 어린 음식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역시 코를 한 번 들이켠 뒤 말했다.
그런데 어머님. 혹시 시은이 외박, 아니 좀 많이 늦게 가도 괜찮을까요? 이렇게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 아이고 내가 걜 몰라. 맨정신으로야 자네한테 어떻게 말했을라구… 알았네. 아유 뭐 날까지 잡은 남녀가 좀 그럼 어때. 다시 연락줘.
예.
진원은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어머니들의 관습적인 반응이 뒤바뀐 듯한 것이 우스워 피식하고는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시은은 여전히 무방비하게 자고 있었다. 진원은 이마에 내려온 시은의 앞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미소했다. 그리고 그 옆에 누워 시은을 끌어안았다가 높은 체온을 느끼고 냉방을 세게 켤까 하다가, 그냥 다시 떨어져 누워 그녀를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노오란 스탠드의 불빛이 잠든 남녀를 따스히 비춰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