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by 지구인



카페를 벗어나며 시은은 진원에게 전화했다.


다음날인 명절 연휴 이틀째에 일찍 본가를 향해 출발할 거라고 진원은 말했었다. 내려가서 어머니와 최종담판을 짓고 올라와 시은의 부모님을 찾아뵙겠다고 했었다. 어머니를 설득할 가능성을 높게 보지만, 끝까지 어머니가 강경하게 나오면 결혼식을 미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조심스레 말했었다. 시은은 그렇게까지… 라며 말려보았지만, 속으로는 식장 위약금 등을 아까워하면서도 엄마는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깐깐한 안사돈이 흔쾌히 허락하지 않는 한 자신의 아버지도 달가워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은은 결국 진원에게 동의했다. 그래서 어찌 됐든 추석 연휴에 둘은 만나기로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은은 그 며칠을 못 참고 지금 당장 진원을 보려 하고 있다.


시은이 정여사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예비 시모와의 두 번째 독대에서 도망치기 위한 핑계만은 아니었다. 물론 계속 있어봐야 정여사는 듣기 싫은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마냥 참고만 있을 수 없는 말을 해서 시은도 말대꾸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저 꾹 참고 속으로 삭이다가 속병이 들지도 몰랐다. 정여사는 공격하고 시은은 방어하고, 정여사는 혼을 내고 시은은 사죄하고. 그러나 정여사가 말한 것처럼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시은은 생각했다.


진원의 옛 여자친구와 마주친 그날 진원과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그의 품에 안겨서 실컷 울고 나서, 시은은 확실히 깨달았었다. 진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그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나아가 그가 싫다고 하지 않는 한 그를 놓지 않겠다는 마음을. 아니 어쩌면 그가 싫다고 할지라도.


요한을 마음에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진원에 대한 마음과는 다르고 그 크기도 차이가 컸다. 요한은 바람, 아니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는 돌풍과도 같았지만 진원은 막내돼지가 열심히 지은 든든한 벽돌집과도 같았다. 돌풍은, 아니 태풍이라도 그건 어쨌거나 지나가고 집에는 어쨌거나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바다에서 강으로 회귀하는 연어들처럼. 설령 커다란 곰의 무시무시한 앞발이 가로막고 있다 해도.


- 응, 시은아.


연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은은 눈을 감았다 뜨면 그가 바로 눈앞에 있었으면 했다.


자기 어디, 집이야?


- 응. 이제 슬슬 누우려고. 내일 새벽같이 나가야 하니까. 자기는?


나 지금 가도 돼?


- 지금? …왜 무슨 일인데.


진원의 목소리에 실린 의문과 걱정을 느꼈지만 시은은 마음이 급했다.


가서 얘기할게. 넉넉잡고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야.


통화를 마친 시은은 택시를 탔다. 진원의 새집이자 둘의 신혼집에 방문하는 것은 집주인에게 이별을 고한 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날 시은은 그 이별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러 가는 것이었다.


진원이 전에 살던 오피스텔에 연락도 없이 찾아갔던 날처럼, 연휴기간이어서 비교적 한산한 편인 도로를 정류장마다 설 필요도 없는 택시는 나는 듯 달렸으나 시은은 앉은 채로 종종걸음을 쳤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때 시은은 문득 갈증을 느꼈다. 정여사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허둥지둥 준비하여 집을 나선 뒤 그녀와 마주하고 나서 현재까지, 긴장감과 두려움 탓으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시은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파트 단지 정문 쪽의 편의점이 눈에 들어오자 시은은 충동적으로 그곳에 내려달라고 택시기사에게 말했고, 곧바로 매장에 들어갔다. 반사적으로 음료가 진열된 냉장고로 향한 시은은 이제 곧 만날 사람이 맥주를 좋아한다는 것을 떠올렸고, 그가 좋아하는 녹색 바탕에 붉은 별 하나가 그려진 수입 캔맥주와 자신이 마실 저칼로리의 국산 캔맥주를 비롯한 주류를 할인정책에 맞추어 섞어서 골랐다. 중간에 몇몇 종류의, 마셔본 바 있는 캔하이볼도 보였으나 시은은 외면했다. 요한이 생각나서였다.


진원은 요한을 만나고 온 일을 시은에게 얘기해주었다. 통화상이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진원의 울 것 같은 얼굴을 시은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자기도… 누구라도 알 수 없는 마음이야. 시은은 아픈 마음을 누르며 그저 조용히 그렇게 말했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어. 혹시라도 자기한테… 우리한테 한 일 때문에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려는 건가, 아니 그건 이미 자해한 일로 충분하잖아. 왜 그렇게 자기학대를 못해서 안달인 거냐고… 진원의 하소연에 그렇게라도 해야 숨 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려다 시은은 그만두었다.


빛나는 태양과 같은 진원과 수줍은 달 같은 요한.


아마도 요한에게 좀 더 가깝겠지만 그 사이 어디쯤에 시은은 있었고, 요한이 그랬듯이 시은 역시 진원이 내뿜는 밝은 빛과 따뜻한 열감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아름다우나 춥고 어두운 요한에게는 끝내 갈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요한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고향에서 연주 어머니한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도 사랑하게 됐나 봐, 그날 애달픈 얼굴로 꺼낸 그 말 외에는 요한이 고백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시은은 기억했다.


당신은 착각한 거야… 나도 진원 씨처럼 당신을 따뜻이 품어줄 수 있을 거라고, 손 내밀어줄 수 있을 거라고. 잠시동안은 그럴 수 있겠지. 그러고도 싶었고. 하지만 얼마나 가겠어. 그러기에 나는 겁 많고 욕심은 더 많고 세상은 잔인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이거야. 시은은 끝내 집어들지 않은 하이볼 대신 맥주캔들과 역시 진원이 좋아하는 건어물 몇 가지와 2+1 할인행사를 하는 육포들을 바구니에 담아 계산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직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히 서 있던 시은은 뒤늦게 네, 종량제 봉지로 주세요. 대답하고는 물건들을 들고나가려다 멈추어섰다. 다시 편의점 안으로 발길을 돌린 시은은 가게 창가에 마련된 바테이블 앞에 서서 비닐봉지 안의 캔을 손에 집히는 대로 꺼내어 들이키기 시작했다.


몹시 목이 말랐기 때문에 시은은 캔의 삼분지일 가량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다시 입을 대어 캔의 절반 정도를 비웠을 때 갈증은 사라졌으나 시은은 꾸역꾸역 남은 술을 식도 아래로 내려보냈다. 평소에는 마시는 데 30분은 걸리는 양을 10분도 안되어 해치워버린 시은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로 편의점을 나섰다.


꽤 묵직한 봉지에 반대쪽 손에는 손가방까지 들고서 시은은 다소 낑낑대며 해당 동의 입구에 도착해서 카드키를 꺼내려다가, 그것을 화장대 서랍 속에 두고 온 것을 떠올렸다.


지금 사는 집은 오래된 아파트인 데다 호수는 세 자리, 비밀번호도 네 자리면 충분한데 앞으로 살 집은 호수는 네 자리, 게다가 개별현관은 비밀번호 입력 전 임의의 숫자에 특수기호까지 터치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빨리빨리’의 국민성에 충실한 시은은 카드키를 선호했다. 할머니야? 진원이 놀렸으나 이게 훨씬 더 빠르거든요? 그리고 코로나 때 교훈도 못 얻었어 자기는? 시은은 화도 내지 않고 대꾸했었다.


시은은 어쩔 수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갑자기 귀찮아졌다. 그래서 세대호출 버튼을 눌렀다.


한편 진원은 시은의 연락을 받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와중에 목이 타서, 늘 냉장고에 떨어지지 않게 쟁여두는 캔맥주를 꺼내 마시고 있었다.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나 했을 때 공동현관 벨이 울려서 진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그래 시은아.


진원은 그는 왜 비밀번호를 안 누르지? 불안감을 느끼며 문열기 버튼을 터치했다. 그러고 나서 또 울리는 개별현관의 초인종 소리에, 시은이 생판 남의 집에 오는 것처럼 구는 게 혹시 또 헤어지자고 말할까 봐 애가 탔다. 설마 또 그 자식 그 소식 때문에 흔들리는 건가, 생각하며 뛰다시피 가서 현관문을 열었다가 진원은 깜짝 놀랐다. 시은이 와락 안겨왔기 때문이었다.


진원은 놀라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시은이 다시 또 헤어짐을 말할 것 같진 않아서였다. 이나가 또 쫓아가기라도 한 건가, 시은을 안아주며 진원은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감는 대신 시은의 다리 한쪽에 떨구어진 그녀의 왼손에서 묵직한 봉지를 발견하고 함께 들렸던 핸드백과 함께 냉큼 받아들었다.


받아줘 자기야. 시은의 속삭임에 진원은 그래 이미 내가 들었어, 라고 방금 받아든 물건들에 대해 답했으나 시은은 아니 그거 말고 나 말야, 라고 두 팔로 진원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진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식으로 말할게. 나 용서해주고 받아줘.


시은이 여전히 진원을 안은 채로 말했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거야…


그 말하려고 왔어.


…일단 들어가자.


진원이 시은에게서 떨어져 현관문이 활짝 열리도록 등으로 지탱해주며 말했다. 시은이 안으로 들어가 거실로 들어서자 뒤따라 들어온 진원은 비닐봉지는 주방 조리대 위에 얹어두고 시은의 가방만 챙겨 그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무슨 일 있었어. 여기 오기 전에, 전화하기 전에 무슨 일 있었지?


진원의 얼굴은 심각했고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시은이 그를 한번 보고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


어머님이 나 호출하셨었어.


…내가 그렇게 부탁드렸는데…


진원이 이마를 짚으며 시은 옆에 앉았다.


아니 그거 탓하려고 온 거 아니야. 고자질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어머님으로서 당연히 그러실 수 있는 거고. 근데 나 어머님 말씀하시는 도중에 자기 보겠다고, 자기 보러 가야겠다고 중간에 뛰쳐나왔어.


시은이 술기운과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맥박도 빨라지는 게 느껴져서 시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 말했다.


나 나쁜 며느리야.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어머님 말씀하시는데 도중에…


뭐라고 하셨는데. 헤어지라고 하셨지?


진원이 화가 나서 일어서자 시은이 다급히 말했다.


어머님께 뭐라고 하지 말아줘. 생각보다 뭐라고 하지 않으셨고, 그래 교양 있게 하셨어. 그래서 나 용기가 났어. 이 정도면 감당할 수 있겠다. 감당해야겠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나고 보고 싶었어.


그제야 진원이 표정을 풀고 다시 앉았다.


잘했어. 고마워.


그가 시은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내 말대로 해줄 거야? 근데 어머니가 계속 반대하시면…


응. 같이, 자기랑 같이 가서 무릎 꿇고 빌게. 읍소할게. 용서해주실 때까지 그럴게.


시은이 진원의 손 위에 다른 손을 얹으며 힘주어 말하자 진원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그래, 그러면 돼. 어머니껜 죄송하지만, 그러면 일대사, 아니 그 이상인가… 시간 좀 걸리더라도 결국 해결될 거야.


응. 도망치지 않을게. 약속해.


시은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고마워.


진원이 더욱 힘을 주어 시은을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시은은 두려움과 불안감이 사라지고 평온함과 안정감이 뭉게구름처럼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익숙하고 편안한 품에서 좋아하는 비누향을 실컷 맡으며 시은은 그대로 잠이 들어 깨지 않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긴장이 풀리고 술기운이 도는 탓이었다.


근데 혹시라도 어머니가 불러내시면 나한테 바로 연락할 줄 알았는데 시은아.


진원이 시은의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하자 시은이 웃으며 몸을 바로세웠다.


너무 무서워서 그럴까도 생각했어. 근데 어머님 찾아간 날 요한 씨 만나고서 영상까지 찍혔으니… 그 일만은 사죄드려야 하잖아, 그거에 대해서만은. 그래서 나갔어.


그래 잘했어. 덕분에 자기가 이렇게 와서 나한테 받아달라고 하니 나도 어머니께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진원도 웃으며 말했다. 시은이 붉어진 얼굴과 풀어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원이 혹시나 했던 시은의 상태를 확신하고 다시 웃었다.


설마 어머니 무섭다고 술 마시고 나간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구경 못한 게 아쉽네.


키득거리던 진원이 시은에게 얼음물을 가져다주려 일어섰을 때,


나 자고 가면 안돼?


시은이 불쑥 말했다.


말해놓고 젊은 여자는 입을 가렸다. 이미 붉은 얼굴이 더욱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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