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거 이모도 한번 봬야겠는데, 같이 가줄래?
희영의 말에 요한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서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모자 아닌 모자관계도,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진원과의 일도 까맣게 모르는 희영으로선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었다. 요한은 만나자마자 꺼낸 ‘그 여자의 아들’이라는 표현 외에는 자신에 대한 적대감은커녕 똑같이 바람난 아비에게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동질감을 느끼는 듯한 이복누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픈 충동을 느꼈다. 어차피 정여사가 입을 다물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요한은 어색한 웃음으로써 얼버무리고 출근해야 한다며 일어섰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 연락해도 되겠니?
희영이 부드럽게 묻자 요한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걱정 마. 우리에게 같은 성씨를 쓰게 만든 장본인을 만나주란 말은 안 해. 그냥…
희영이 싱긋했다.
그냥 아줌마 주책이라고 생각해.
요한은 그저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큰고모를 다시 뵙고 갈까 하다가 그 아픈 아우를 만나주라고 할까 봐 그대로 병원을 나섰다. 그는 습관처럼 바지 주머니를 더듬다가 담배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진원에게서 소식을 들은 태수가 수술 때까지만이라도 금연과 금주를 하라며, 힘들 테니 자신도 함께 하겠다면서 요한의 담배를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래놓고 정작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것은 태수였다. 반대급부로 군것질이 늘어 요한은 그의 간식거리를 압수해주어야 했다. 대신 지수가 껌과 무가당사탕 등을 한 아름 사다주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요한이 말려도 보았으나 태수는 작은 눈을 부릅뜨며 이 기회에 나도 건강 좀 챙겨보자는데 너 협력 안 할 거냐? 언제는 술담배라도 끊어야 연애 가능성 있지 않겠냐매! 헛소리였냐? 소리쳤다. 그럼 술만 조금 해요. 어차피 술장산데 의미 있어요?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술만 마실 자신 없다. 내비둬. 너야말로 몰래 하다 걸리면 죽는다. 아니 이식을 못하게 할 거야. 태수가 호랑이 같은 눈을 했다.
그 말에 요한은 자신이 수술실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떨까 상상했다. 기대만큼 실망도 크다고 하지들 않던가. 그러나 환자의 절망하고 원망하는 얼굴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바에야, 옛날에 자신을 맡으려고도 했고 지금은 또 그 잘난 동생의 수발까지 들고 있다는 정 많고 주름은 더 많은 큰고모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은 진원에게 말했고 태수는 듣지 않았어도 알아주는 것처럼, 이 기회에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일말의 부채감을 모조리 씻어던지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몸속 피의 절반과 마침내 절연하고 나면, 남은 피의 절반의 주인을 만나도 세상 떳떳할 기대도 요한은 했다. 어쩐지 자신의 결정을 엄마는 칭찬해줄 것만 같았다. 우리 착한 아들. 정여사가 두 팔을 벌리며 우리 잘난 아들! 활짝 웃으며 진원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예쁜 딸! 하랑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친부와의 유대감을 기억 못하는 요한으로선 김원장이 어깨를 두드려주고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만으로도 부자지정을 육신의 온기를 통해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었지만, 사춘기 이전 하랑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이미 정여사는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요한의 손조차 제대로 잡아주지 않았으므로 요한은 모정에 허덕였다. 사포질 전의 목재처럼 거친 손바닥이라도 볼을 어루만지는 고모의 손길은 정다웠으나 어디까지나 고모, 삼촌이었다. 낳거나 키워준 엄마, 일촌은 아니었다.
엄마 손은 고모 같겠지. 공들여 관리하는 어머니 같지는 않겠지. 요한은 자신의 양손을 펼쳐 들여다보았다. 손도 엄말 닮았을까. 밥벌이 때문에라도 손에 물을 수시로 묻히고 취미로는 펜과 붓을 드는 탓에 요한의 손은 얼굴처럼 매끈하지 않았다. 더구나 살이 없을 뿐이지 손의 골격 자체는 큰 편이었다. 손발은 그 노인넬 닮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요한은 쓸쓸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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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명절이 코앞에 다가오자 정여사는 조바심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들이 결혼을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진원부자는 요한의 말에 기대어 시은에게 면죄부를 준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욕심 많은 친부의 요구 때문에, 그리고 순순히 그러마 했다는 것 때문에라도 진원은 이미 요한을 찾아가 만났고 마음 아파하고 있지 않은가. 온유한 남편과 유순한 딸내미야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과 달리 그저 속 터지게 착해빠진 세 식구는 이미 그 죄 많은 탕아마저 용서했음이었다. 정여사는 아이고 주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놈의 영감탱이는 또 왜 하필 이때에… 정말 평생을 두고 도움이 안되는, 웬수다 웬수! 정여사는 가까스로 남편 앞에서는 짐짓 걱정의 얼굴을 하고 돌아서서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래도 사람이 아프다는데,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세월이 얼만데 그러면 못써요. 지난날 날 얼마나 챙겨주셨어요. 요한이 나고부터는 당신한테도 수시로 값비싼 선물들 보냈구. 어쨌든 그애, 우리 작은아들 친부 아녜요. 그러지 말어요. 듣지 않아도 한 이불 덮고 자는 이의 말이 정여사의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으이구 조선시대에나 태어났어야 할 양반… 정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제로 김원장은 제법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가세가 쇠락하기까지 한 집안이었다. 의사인 아들 유세에다 그러한 자부심까지 얹어진 탓에, 작고한 시모는 서울 강남에 자리 잡은 꽤 규모 있는 자산가인 사돈 앞에서도 좀처럼 등을 굽히지 않았다. 반면 족보의 신빙성은 대다수의 집안처럼 불투명한 데다 독립운동은커녕 부일하여 재산을 지키고 불린 부친을 둔 정여사의 친부는 처음엔 약간 기가 죽었다가, 처가 덕도 거절하고 끝끝내 고향땅만을 고집하는 사윗감에게는 더는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 때문에 정여사도 제법 고전영화 같은 사랑과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은 지난 일. 타산적인 현실주의자인 여인은 까마득한 옛일은 잊은 지 오래였다. 정여사는 현재 닥친 문제만을 골몰했다. 설령 전쟁에서는 지더라도 전투에서라도 이겨야겠다. 정여사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뒤집어 되새기며 포탄을 투하할 목표물을 신중히 살폈다.
그 모친과 딸을 두고 약간 고민하긴 했지만 역시 안사돈보다는 며느리가 제격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 어미도 딸에게 뒤통수 거하게 맞은 꼴이지 않겠는가. 더구나 고 불여우 같은 것이 결혼을 핑계 대고 걱정하는 척 제 발로 찾아와 상간남의 사연을 알아가기까지 했겠다! 정여사는 더는 참지 못하고 모임차 상경한 날에 맞춰 시은을 호출했다.
잔뜩 겁먹은 얼굴과 떨리는 손을 하고 평소보다 더 깊이 허리를 굽히는 을과 마주하며 갑은 우월감을 만끽했다. 후궁에 대한 질투로 감히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탓으로 원자를 낳고서도 시모인 대비에게 쫓겨난 폐비 이야기를 다룬 대하드라마를 떠올리며, 정여사는 그때 같으면 그냥 바로 사약이다 이것아, 극중의 대비마마처럼 시은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주문한 음료가 서빙될 때까지, 정여사는 그렇게 토끼를 잡아먹으려는 승냥이만 같았다.
길게 말하지 말자.
정여사가 표정을 풀고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차분히 말했다. 시은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 꼴을 보자 정여사는 부아가 치밀어 좀 전에 했던 자신의 말을 바로 어기고 말았다.
차라리 애 딸린 이혼녀가 낫지 엔간한 친형제보다도 더 친한 그애랑, 그것도 나 만난 그날 그곳에서, 호텔 앞에서 응? 그런 짓거리나 하고 다니는, 세상에 결혼을 코앞에 둔 여자가 응?! 네가 조금이라도 양심 있으면, 사람이면! 네가 알아서, 어디 도망쳐 숨기라도 했어야는 거 아니니?!
죄송합니다…
시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정여사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시은은 그 말 한마디만 하고는 입술을 씹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제라도 물러나겠니?
……
죄송하다며, 설마 이대로 입 씻겠단 거니?
…죄송합니다, 어머님.
얘, 확실히 말해! 내 아들 놓아줄 거야, 말 거야?
시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히며 정말 죄송합니다, 말하고는 조신히 다시 앉았다. 그 사이 시은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셨다. 목소리의 떨림도 사라졌다.
그날, 어머님께서 바쁜 시간 내어 제게 자세히 말씀해주셨는데 바로 그날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백 번 사죄드립니다. 어머님이 전화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점에 대해서만은 제가 먼저 용서를 구했어야 했는데, 제가 겁이 많아 차마 그러지 못했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속으로 요것 봐라, 하면서 정여사가 꼬았던 다리를 풀며 고쳐 앉았다. 시은이 고개를 들고 정여사를 마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희 둘 사이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저희끼리 해결하겠습니다.
뭐야?
진원 씨가 싫다고 하면 모를까, 어머님이 그러신다고 물러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기로 약속했어요.
시은이 결연한 얼굴로 말하자 정여사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역시나 싶었다. 두것들은 이미 재결합한 것이 틀림없었다.
너, 내가 그렇게 우스워? 세상 아무리 변했어도 넌 며느리야, 그것도 신데렐라! 그런 주제에 양다리까지 걸쳐놓고 뻔뻔스럽게 뭐, 난 빠지라고?
정여사가 마침내 애써 감추었던 속마음을 드러내 보였으나 시은은 미소했다.
이미 알고 있던 바였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으므로 시은은 전혀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정여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아무리 본인 체면 때문이라고는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어디 호텔방에라도 불러내거나 아예 집에 쳐들어와 난장판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개방된 공간, 그것도 세련된 호텔 커피숍으로 불러내 욕설과 손찌검 한 번 없이 그저 닦달하는 게 전부라니, 연락을 받고서는 겁에 질려 진원에게 알릴까 고민했던 것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얘 좀 봐, 웃어?
죄송합니다…
시은이 황급히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안 헤어진다고? 그냥 결혼한다고?
그보다 어머님,
시은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요.
얘 좀 봐! 지금 이보다 급한 일이 어딨니?!
정여사가 소리쳤으나 시은은 가방까지 챙겨들더니,
어머님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요. 지금 당장 봐야겠어요.
새악시 같은 얼굴로 말하고 꾸벅 인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장소를 빠져나갔다.
얘! 안시은! 저저저… 저 맹랑한 것이…
뒤늦게 일어나 손가락질하며 외쳐보았으나 그 ‘맹랑한 것’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괜히 사람들의 주목만 받은 정여사는 잘 손질한 머리를 매만지는 척하며 도로 앉았다. 어차피 쫓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이는 새파란 청춘 때도 뛰어다닌 적이 거의 없이 운전기사가 딸린 차량을 타고 다녔던 부잣집 아가씨였다.
아들을 보러 간다고 했으니 진원을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아마도 그 결과에 상관없이 마지막이 될 아들 커플과의 대전투를 벌여야 할지도 몰랐지만, 고상한 귀부인답게 정여사는 우선은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