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문장들 a.k.a 자아도취 - 2편

<부등변삼각형> 2부 중에서

by 지구인


(하아, 또 브런치북으로 발행을 못하고 그냥 발행을 하고 연재일 다음날 아침에 알게 됨ㅠ-ㅠ 이건 왜 수정이 안될까요~ 자유연재도 불가하고 좀 답답하네요)




14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가 연주였다면 포기해야 하는 남자를 보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일터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을 것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나는 그랬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생각을 덜기 위해, 그에 대한 생각이 차지하는 뇌의 용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나는 더욱 OTT에 많은 시간을 썼을 것이다.


……


그렇게 눈에라도 담아야 할 정도로, 그렇게라도 한 공간에 있고 싶을 정도로 요한이 아름다운 것은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랑도 있다고 유행가 등에서는 말하지 않던가. 그런 바보 같은 사랑을 다룬 노래나 영화 등이 꽤 인기가 있는 것을 보면 나와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16화. 이삿날(2)

진원도 나도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며 사랑만 받으며 자라지는 못했다. 진원은 부모에게 사랑보다는 기대를 받았고, 나는 기대조차 별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나마 뒤늦게 학교 성적이 올라 중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고 어렵지 않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에야 엄마의 시름을 덜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 엄마를 가장 기쁘게 한 일은 진원을 사윗감으로 데려온 일이었음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던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며 자라지 않았다면 나는 애정에 굶주린 아이로 자랐을 것이다. 듣기 좋은 소리는 좀처럼 하는 법이 없는 괴팍한 성격의 할머니는 당신의 자식들에게조차 아끼던 애정을 아들손주도 아닌 나에게만 주었다. 당신의 첫손주이자 같은 방을 쓴다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유로.




19화. 말다툼(1)

순간 요한에게는 진원뿐 아니라 사장님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혹시라도 결국 진원을 잃게 되더라도, 요한에게는 그가 부모처럼 형제처럼 함께 있어줄 것이다. 허락되지 않았던 부모와 형제의 정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남자에게서 받는 요한은 어쩌면 그만큼의 행운은 함께 하는 것인지 몰랐다.


나는 이제 되도록 그를 안 볼 것이지만 그가 불행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 충분히 불행했다. 다만 나는 더 이상은 그가 나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기를, 그러므로 부디 내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복을 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20화

사진과 영상을 촬영할 스튜디오, 그를 위한 드레스 고르기, 미용실 예약 등은 플래너가 있어도 최종 결정은 결국은 예비 신부의 몫이었다. 그나마 신랑신부와 양가 어머니들의 한복은 진원의 어머니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해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역시나 가격대가 높은 곳이어서 엄마와 나는 못내 그 돈이 아까운 것이 흠이었다. 신혼여행 관련해서도 일이 많은 진원을 대신해 내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 다 들이지 못한 가구와 가전, 식기와 소소한 생활소품들을 고르는 것 역시 내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진원의 어머니와 내 엄마 모두를 만족, 아니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노력해야 했다. 내 엄마의 잔소리에는 단련이 되어 있었지만 예비 시모의 눈총에 대해서는 경험도 자신감도 없었고, 엄마의 말대로 ‘반반결혼’도 아닌 마당에 되도록 트집 잡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을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살펴야 했다. 쉬는 날마다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진원과 데이트나 하고 드물게 친구들과 만나던 느긋하고 단순한 생활은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다.




진원의 어머니는 나만큼이나 살림에 서툴렀다.


그것은 젊어서부터 친정의 지원으로 사람을 부리는 호사를 누리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녀 역시 나만큼이나 집안일에 큰 관심도 욕심도 없었다. 그녀와 나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일 것이다. 자식이 좋아하는 반찬을 정성껏 만들어 택배로 부쳐주는 일따위는 그녀의 사전에는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무던한 성품이어서 어차피 재주도 관심도 없는 아내에게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을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내 예비 시어머니가 관심을 쏟아온 것은 외모를 가꾸는 일 - 그럼에도 그녀는 미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엄마는 돈 들여 관리해서 그 정도지 원래 인물은 없다며, 진원이 아버지를 닮아 다행이라고 평했고 나도 동의한다. - 과 값비싸고 고급진 물건들을 사들이는 일,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 활동이었다고 진원은 말했다. 어렵게 얻은 삼대독자와 오랜 시도 끝에 겨우 얻게 된 늦둥이 딸에게도 진원의 어머니는 주로 팔자에 타고난 것 같은 금전력으로써 애정을 보였다고 했다.


진원이 모친에게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것이 그래서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와 요한과의 소원함을 초래한 어떤 계기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진원이 어머니에게 다소 냉랭하여 나에게도 대리효도를 강요하지 않을 뿐더러,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며 나를 불러댈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식구들 입에 들어가는 것은 한평생 직접 만들어온 나의 엄마는 주말에라도 김서방을 불러 밥을 해먹여야겠다고 나섰다. 이 참에 너도 김서방이 좋아하는 한두 가지 음식은 배워놓으라는 것이었다. 요리 못하는 시엄마 기도 좀 죽여놓을 겸 식혜나 약밥 같은 그럴 듯한 전통 음식을 배워놓으면 어떻겠느냐고도 했다.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이니, 엄마는 타고나기를 깔끔하고 부지런한 성격에 삼십 년 갈고닦은 ‘주부력’을 자신과 닮지 않아 별로 희망이 없는 딸에게 억지로라도 전수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승리감을 맛보고자 하는 것 같았다.




21화. 비밀

진원은 정말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요한만 아니었다면 그가 내게 이렇게 쩔쩔맬 필요도 없었다. 진원이 나쁜 남자였다면 울엄마가 사준 내 명의 내 집인데 지금 당장 너랑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내 형제 같은 친구 잠깐 지내게도 못해?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용렬하고 치졸한 말이긴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우정 앞에 사랑만 앞세우는 옹졸한 사람이었다면 요한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 눈치만 보느라고 그를 모른 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좋은 남자이고 관대한 사람이므로 오히려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 상황뿐 아니라 그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나는 불안했다. 못내 불길했다.




나는 내 엄마의 딸이 분명했다. 뜨거운 음식은 뜨겁게, 찬 음식은 차게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아일랜드 식탁에 상을 차리고 있었다. 나는 다소 당황해하는 진원에게 위아래 옷을 입고 오라고 시켰고, 넋이 나간 듯 앉아 있는 요한에게는 와서 앉으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밥과 곰탕을, 갈비찜과 잡채와 나물들과 생선구이와 새로 담은 오이소박이와 김치냉장고에서 새로 얽은 김장김치 등을, 접대용이 아닌 평상시에 쓸 거라 부담감 없이 사놓았던, 잘 깨지지 않는 재질의 무늬 없는 하얀 그릇들에 담아 차렸다. 엄마가 온힘을 다해 꽁꽁 싸맨 덕분에 아직 온기는 남아 있었으나 곰탕은 데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전자레인지에 1분 가량 돌린 국에서 다시 힘차게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나는 만족했다.




24화. 고백(2)

너무도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고, 동시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집에까지 오는 길은 그저 습관적으로 몸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이미 나는 요한의 말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말들이 귓가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가, 이내 동영상 공유 앱을 켰다. 평소에는 보지 않으려 노력해온 1분 이내의 짧은 영상들을 보며, 조금이라도 웃기지 않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 바로 넘겨버렸다. 집에서는 무섭고 잔인한 영화나 드라마를, 아니면 화려하고 시끄러운 액션 영화를 쉬지 않고 봐야겠다, 나는 이번에도 그렇게 회피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내가 요한의 말들을 곱씹으며 고민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결심하고 그 결과를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는 것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의 행동의 배경을 궁금해하고, 그 궁금증을 못 이겨 단 둘이는 절대로 만나지 않으려고 했던 결심을 어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진원과의 결혼식, 그것에만 집중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결심이었다.




25화. 열감기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래놓고는 정작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고 일탈을 일삼거나 병이 나버리는 그의 나약함이었다. 내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나 역시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요한이었다면 더 심하게 잘못돼버렸을지 모른다는 직감 때문에 그를 보는 것이 괴롭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애써 모른 척하고 있고 남들에게는 철저히 숨기고 있는 나의 모습을 그에게서 봐야 하는 것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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