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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망자 Oct 04. 2024

약속의 네버랜드와 시녀이야기

개인은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2021년도에 가장 충격적으로 봤던 두 작품이 핸드메이즈 테일과 약속의 네버랜드다. 둘 다 시즌 1씩 밖에 보지 못했는데, 충격적인 설정과 전개로 사실 꾸준히 다음 시즌을 시작하며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핸드메이즈 테일은 계속해서 주요인물 ‘준’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가하는 장면이 등장한다기에 더욱 꺼려졌다. 시즌 1에서 제시되는 인물들의 고통을 제기하는 것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여겼고 지구상에서 어떤 여성들은 실제로 겪고 있기 때문에 납득하기엔 충분했지만 이 이상 가학적인 장면이 필요할까 싶어서 그렇다. 물론 보고 판단해야겠지만 그냥 고통도 아니고 끔찍하게 고통 받는 여성의 모습을 시즌 4가 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어쩐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한번쯤은 봐야할 드라마임에는 분명함. 특히 시즌1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 해 최고의 드라마였음을.



핸드메이즈 테일은 디스토피아가 도래한 가까운 미래를 보여준다.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에 자연적으로는 임신이 힘들어 인구절벽의 사태까지 맞이하게 된, 인류의 과오로 맞이하게 된 암울한 미래인 것. 그 와중 미국의 한 집단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여성을 합접적으로 착취하는 국가인 '길리어드'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멀쩡히 일 잘 하던 여성들을 내쫓아 시녀로 만들고 성소수자들은 성경 말씀에 맞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처형'한다. 남성들은 꼴같잖은 사회에서 양복 입고 일하고 그들의 부인들은 시녀보다는 나은 처우를 받지만 초록 드레스 하나 입고 남편을 빨아주며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 시녀들은 빨간 드레스를 입힌다. 계급을 복식에 넣어 눈에 띄게 한 것. 게다가 시녀들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들이 되는데 불임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그게 여성 몸의 잘못이 아니라 남자들 좆이 문제일 수도 있다고 짚어줌) 지배층 가정으로 팔려가서 강제로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해야하기 때문. 그야말로 여성을 인구수 유지를 위한 도구로 보는 최악의 사회다. (한국 사회라고 다르지 않다는 걸)

엘리자베스 모스의 연기가 일품이었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터져나오는 음악, 그리고 의상 디자인이나 카메라 워크도 빼어난 드라마지만 원작 ‘시녀 이야기’에서 글로 접했던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충격적이고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일을 할 수도 없고 신체를 가려야 하고 아이를 낳는 것 이외의 능력은 모조리 무시 당해야 하는 사회. 그 외에 다른 길을 모색하면 가차없이 존재를 지워버리는 사회. 이건 SF의 표피를 입은 하이퍼 리얼리즘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가장 충격적인 건 한 집단을 향한 혐오가 단순히 그 집단에 속하지 않는 다수에 의해서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같은 여성이더라도 여성을 향한 혐오와 차별을 위해 앞장서는 여성도 있다. 크게 보면 그런 여성들조차 피해자임에 분명하지만, 피해를 입는 집단 가운데에서 가해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인물들이 있기 때문에 저항과 행동은 더욱 교묘하게 저지당한다. 이러한 디스토피아가 도래하기 전 세상에 살던 성노동자나 생계를 이어나가기 힘들었던 인물들은 오히려 이런 사회에서 조용하고 안온하게 살아가길 바라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여성이 적합한 시녀가 되기 위해서 여성들을 다그치고, 전기 충격기로 위협하며 복종을 종용하는 여성인 ‘리디아 이모’가 대표적이다. 왜 이 중년의 여성이 이런 위치에 오게 되었는지 시즌 1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이런 여성들이 없었다면 일종의 ‘시녀 프로젝트’는 완벽하게 구동하지 못했을 것.



게다가 이 모든 사회의 학문적인 기반을 마련한 것이 지배층 사령관의 아내인 '세레나 조이'라는 것. 이 인물은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저서까지 써낸 고학력자이고 새로운 법령을 고안해내며 정치적 지식도 익힌 인물이지만 자신이 만든 규칙과 법에 의해 남편에게 복종해야하는 여성상에 자신을 끼워맞춰버린다.


여기서 약속의 네버랜드와 비슷한 부분이 생긴다.



약속의 네버랜드에서는 보육원에서 보호자로 아이들을 돌보며 아이들에게 ‘마마’라고 불리우는 인물인 ‘이사벨라’가 등장한다. 고아인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머무를 수 있는 건 12살 생일이 오기 전까지고 그전에 아이들은 양부모가 배정돼 입양을 가곤 한다. 보육원의 주요 인물 엠마와 노먼, 레이는 곧 12살 생일을 맞이할 아이들이고 보육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똑똑한 인물들이다. 

보육원에서 6살배기 ‘코니’에게 양부모가 배정되고 코니가 보육원을 떠나는 날 밤, 코니가 애지중지하는 인형을 보육원에 두고가자 엠마와 노먼은 길을 떠난 이자벨라와 코니를 뒤쫓다 코니의 시체를 발견한다. 

알고보니 이사벨라는 아이들을 키워 양부모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12살 미만의 어린 아이들을 ‘식용’으로 잡아먹는 집단에게 제공하는 ‘사육자’였던 것. 이러한 역사는 오래되었고 이사벨라 역시 식용 ‘농원’에서 자라났지만 그들 사이에서 인정받아 식용 인간을 길러내는 ‘사육자’의 위치까지 오르게 된 것. 엠마는 이사벨라에게 ‘당신도 이곳에서 길러졌으면서 어떻게 우리를 팔아 넘길 수 있냐’ 며 묻자,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행동했다고 아이들에게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네버랜드는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들이 머무는 곳. 어른이 된 이사벨라는 자유를 버리고 살아남은 아이가 되어, 다른 아이들을 팔아 넘기며 사는 것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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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개인이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나는 뭘 다르게 할 수 있었을까? 사실 접점 없을 것 같은 두 작품이 내게 겹쳐보였기에 신나서 말한건데 사실 결론은 없다. 부당한 체제나 구조, 지배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있고 그게 결국 내가 속한 집단이나 뿌리? 민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해도(너무 순화된 말이지만) 눈앞에 현실을 살아가기에 벅차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을 무조건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투쟁의 서사는 언제나 복잡한 심정을 내게 남긴다. 그리고 그런 서사는 언제나 교차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누굴 데려가고 누굴 버려야 하나. 모두를 데려갈 수는 없는 걸까. 그러나 모두를 데려가기에 시간이 너무 없는데 그러려면 운동과 투쟁을 가능케 했던 신념을 구성했던 몇 가지를 가지치기 해내야 한다. 효율을 위해 무언갈 포기해야 한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다른 누군가는 지워져야만 한다. 그런데 과연 그게 투쟁이자 운동에 해당할까. 목적 완수로 인한 열매가 운동당사자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과연 혁명이나 운동일까. 

두 작품은 모로봐도 극단적으로 잘못된 사회를 보여주고 있지만 시스템에 휘말려버린 중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고뇌와 아픔을 모두 제시해주며, 거대한 적에 대해 역설해준다. 두 작품의 결말을 모두 보지 않았기에 투쟁 당사자인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취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둘 다 믿음과 연대를 강조한다. 순진하게 비춰지지 않도록 그러한 희망 뒤에는 반드시 감당하기 힘든 절망의 씬들을 보여주며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아 근데 이 두 작품은 세상이 너무 끔찍해서 사실 유대와 믿음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시청자까지 아연하게 만드는 게 좀 매력이자 단점인 것 같음.. 

한정현 씨의 소설을 읽으면서 지나간 아픈 역사를 다루는 가장 따뜻한 방식이라고 여겼지만 그게 현실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고. 소설을 읽은 나의 현재는 조금 변화했겠지만 스러졌고, 나와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다 스러진 채로 생을 마감한 인물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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