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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12. 2024

[소설] 이루다 1  어둠을 품은 빛

파멸한 세계에서

빛이 피어나려면 어둠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빛은 어둠을 품기로 했다.   

  

아침부터 습기가 온 땅을 짓누르는 축축한 날이었다. 동이 트지 않아 새벽안개가 자욱한 창문 밖은 가도 가도 잿빛뿐이었다. 우기가 빨라진 탓이라고들 했다. 특별히 나쁜 일은 아니라고들 했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도 아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몇몇 이들은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고 졸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몸단장에 여념이 없었고, 또 다른 이들은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담요를 두르고 가는 내내 언제 도착하는지 어른들을 채근했고, 이제 막 어른이 될 참인 애들은 끼리끼리 대화하느라 바빴다. 간혹 보이는 노인들은 조용히 앉아서 힘을 비축했다.

기다리는 아이들이 지칠 무렵, 멀리 반짝이는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 찬란하게 빛나 보였다. 얼마나 큰지 가늠도 되지 않은 빛은 S시의 자랑이었다. 땅 위에 저렇게 아름다운 빛을 발광하는 돔을 세운 도시는 그리 많지 않다고 들었다. 끝없는 지평선 위에 봉긋하게 피어오른 모양은 사람들을 설레게 했다.


“곧 빛의 돔에 들어갑니다. 셔틀이 소독을 마칠 동안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친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셔틀이 돔 안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환한 빛이 일제히 쏟아져 창문에서 반짝거려 눈부셨다. 셔틀은 어린나무들의 인사를 받으며 가로수길을 천천히 달려 곧장 ‘첫 정원’이 있는 길로 접어들었다. 첫 정원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즐비했다. 이름은 몰라도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염원을 담아 태어나고 자란 귀한 꽃들이었다. 식물들이 잘 자라면 동물이 살 수 있고, 그런 공간이 넓어지면 언젠가는 사람도 지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돔 안에는 시청과 시 병원으로 내려갈 수 있는 셔틀용 엘리베이터가 두 군데 있다. 병원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존에 멈춘 셔틀이 중앙 교통 센터와 통신하는 사이 사람들에게 잠시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고작 3분이었다. 밖으로 나가서 향기를 맡을 수도, 야들야들한 잎사귀의 감촉을 느껴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했다. 어른들은 흐뭇해했고 아이들은 양손과 코를 창에 바짝 대고 구경했다.

“엄마, 정원에 핀 색들이 다 달라요. 진짜 예쁘다. 엄마, 저건 무슨 색이에요? ”

네댓쯤 되어 보이는 꼬마애가 검지를 창문에 대며 옆에 앉은 제 엄마에게 물었다. 아이가 가리킨 꽃은 하늘이 잘 보이는 저녁에 가끔 볼 수 있는 진한 노을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비교육 그룹에 속한 젊은 엄마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루다는 아이에게 색이름도, 꽃이름도 하나하나 알려 주고 싶었지만 나서지 않았다.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검사받고 선생님 만나면 물어볼까? 선생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니까.”

아이 엄마가 다독이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종이 한 번 울리고 안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시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의 공헌으로 우리 도시는 발전하고 있습니다. 상반기 우리 S시의 성적은 아주 좋습니다. 하반기 성적도 기대됩니다. 올해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돔이 더 넓어집니다. 여러분의 기여로 건설된 여기 시청에서 다 함께 살 수 있을 때가 곧 옵니다. 여러분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파키오도 늘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시 병원으로 하강합니다.”

셔틀이 땅속으로 내려가자 문이 닫혔다.     


대기실 문이 열렸다. 루다는 최대한 살금살금 걸으려 했다. 구두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를 따라 가슴도 쿵쿵 울려 옥죄는 것 같았다. 티끌 하나 없는 하얀 벽과 모자이크 무늬가 반듯반듯하게 정렬된 바닥, 푹신하고 안락한 의자도 불편했다. 그렇지만 곧 만날 ‘어제’가 기대되어 의자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곧 루다는 언제나처럼 순식간에 펼쳐진 ‘어제’에 푹 빠져들었다.


‘어제’는 날마다 달랐다. 맹렬히 돌진하다 내빼는 푸른 파도인 날도, 구름도 모자라 볼까지 상기시키는 붉은 하늘인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억수로 내린 비에 흘러넘친 황톳빛 물결이었고 어떤 날은 어두운 도시에서 반짝거리는 하얀 눈이었다. 편지에 쓸 말을 고르는 수심에 찬 낯빛이기도 했고, 문자를 입력했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설레는 얼굴이기도 했다. 홀로 밤을 지키는 쓸쓸한 길이었다가 수많은 인파에 짓밟히며 아침을 맞는 길일 때도 있었다.

‘어제’는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영상이 있어서 홀로그램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당시 사람들의 생김새가 지금 사람들과 비슷해서 신기하곤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살아가는 모습이 다양했다는 것.


만개한 파란 꽃들이 흔들리고 흔들렸다. 지평선 끝까지 만발한 꽃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지언정 꼿꼿하게 제 자리에 붙어서 숨 쉬고 있었다. 홀로그램인 걸 알면서도 이곳에는 거센 바람도, 검은 구름도 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꽃 속으로 눈이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속이 훤히 보였다. 파란 물감에 흰색을 얹어 손을 쓱 문질렀을 때처럼 안쪽으로 갈수록 말간 하늘빛이 감돌았다. 희디흰 중앙에 자리 잡은 오묘한 보랏빛 꽃술이 떨리고 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꽃잎을 향해 허공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오늘은 수레국화밭을 보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맑고 친절한 안내가 끝나자마자 꽃밭이 사라졌다. 하얀 벽과 벽 사이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회색 문이 살짝 열렸다. 루다는 이 순간이 오는 것이 싫었다. ‘어제’가 보여 주는 곳에서는 모든 생명이 활기가 넘쳤다. 잠시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이 루다를 자극했다. 확실한 것은 ‘어제’가 꺼지면 저 세계에서 추방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속박된 죄수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일어나야 했다. 루다가 가야 할 방에서 재촉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루다 왔구나! 어디 보자.”

YO는 특별한 계급임이 분명했다. 적어도 파트리아 사람은 아니다. 메디움 출신일까? 매달 한 번씩 꼬박꼬박 만나는데도 도통 그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쑤군거렸지만, 누구도 그가 어디 출신인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명확하게 가려내지 못했다.      


오늘만 해도 병원에 오는 셔틀 안에서 옆집 아이들이 YO는 누구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파키오에 가는 게 일생의 소원인 재이는 “수려한 외모에 늙지 않는 얼굴이니 파키오인인 게 분명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루다보다 두 살 어린 그 집 막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이 멍충아. 일하는 파키오 사람 봤어? 아니, 파키오 사람을 본 적이 있어야 파키오 사람인지 아닌지 알지. 본 적도 없으면서!”

“이게 누구더러 멍청이래? 나이도 어린 게! 딱 보면 몰라? 우리랑 다르잖아! 돔처럼 빛이 나는 그 얼굴!”

“나이 많아서 좋겠네. 나이 많으면 팔 것도 없는데!”

“요새 영실버가 새로운 상품으로 떠오르는 거 몰라? 거기도 권위 있는 계층은 고상하게 나이 든 이미지가 유행이잖아.”

“풋-”

막내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일부러 내었다.

“누나에게서 고상한 건 찾을 수 없으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많이 팔아.”

“너는 뭐 쭉 어릴 줄 알아?”


앙칼지게 되받아쳤지만 재이의 표정은 이내 침울해졌다. 5년 후면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할 텐데 스캔 고객이 점점 줄고 있으니. 스캔 고객이 없으면 가족 돌봄을 받아야 한다. 곧 저 되바라진 동생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한단 소리다. 애석하게도 옆집에서 가장 수입이 많은 쪽은 늘 동생이었다.

“넌 좋겠다. 고정 고객이 있어서. 아주 부자라지? 파키오에서도 계급이 꽤 높은가 봐? 그런데 희한하지. 네가 딱히 고급져 보이지는 않는데 말야. 흉측하게 생겨서 말이야. 직접 홍보할 수 있으면 내가 너보다 훨씬 등급이 높을 텐데. 아니 왜 모든 판단을 YO가 하냐고. 나는 정말 객관적으로 평가하는지 의심이 돼. 어릴 때부터 한결같이 A그룹이라는 게 말이 돼? 부모도 없는데. 안 그래?”

재이가 동의를 구한다는 듯 동생들을 표정으로 압박하고선 맞은편에 앉은 루다를 고까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루다는 떨떠름하게 웃을 뿐이었다. 뭐라 말해도 소용없을 걸 알았다. 그때였다. 한 달간의 성장사 브리핑을 연습하던 샌이 입을 열었다. 나직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언니. YO는 파키오 정부에서 직접 보냈어. 그를 모독하는 것은 정부를 모독하는 것과 같아. 반정부 발언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언니가 더 잘 알겠지. 그리고.”

샌은 잠시 숨을 골랐다. YO가 어떤 존재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파키오에서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할 뿐.

“YO는 메디움인이겠지. 파키오인은 그런 일은 하지 않아. 다스리는 일을 하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루다는 늘 어려웠다. 루다가 사는 S시에서 루다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은 허다했다. 두 블록 뒤 아름답고 총명하기로 손꼽히는 동갑내기 여자애는 분 단위로 해야 할 일을 정해 철저히 지키기로 유명했다.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애는 파키오에서 근육남이 유행한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스캔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어떤 어린애는 유당 알레르기가 있는데도 매일 우유를 마셨다.

루다 역시 살아남기 위해 온 노력을 다하지만, 감히 자신의 노력이 그들보다 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꾸를 안 했더니 싹수가 없다 그러고 너희도 좋은 등급을 받게 될 거라 하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라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그러니 평소에도 재이와 동생 사이에서 별말을 하지 않는 샌이 나서 주니 마냥 고마웠다. 병원에 다다랐을 때 아주 잠깐 샌과 눈이 마주쳤다. 루다는 쭈뼛쭈뼛 고맙다는 눈인사를 건네 보았다.

“딱히 너 편들어 준 거 아냐. 오늘도 넌 나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겠지. 곧 ‘올해의 신부’가 되겠네. 잘 가라.”

샌은 차가운 눈빛으로 루다를 쏘아보고는 일어섰다. 윤기 나는 단발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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