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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13. 2024

[소설] 이루다 2  임종을 지킨 첫 사람

파멸한 세계에서

“올해의 신부…되고 싶지 않아요.”

YO가 물끄러미 루다를 내려다봤다. 말수는 적지만 의사 표현이 분명한 아이다. YO는 의아했다. 신부가 되는 것은 이곳 아이들의 꿈이자 삶의 이유이다. 

“평생에 단 한 번의 기회야. 성인식을 치르는 아이 중 아주 극소수의 아이만 거머쥘 수 있는 혜택이지. 이 땅을 떠나 파키오로 갈 수 있는! 너는 가장 빛나는 집에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어.”


“선생님. 저는 메디움에 가서 일하고 싶어요. 어떤 일이든 괜찮아요. ‘어제’가 우리들의 미래라고 했잖아요. ‘어제’에서 본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그렇게 산다는 게 어떤 거니?”

“잘은 모르겠어요.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슬픔에도, 기쁨에도, 좌절에도 기운이 있어 보였어요. 우리도 그런 감정이 있는데 뭔가 달라 보였어요. 메디움에 가면 그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공부하거나 일하는 거요. 그러다 보면 그게 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루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YO의 표정을 살폈다.


“특이하구나, 루다. 그런 게 궁금하다니. 그런데 원한다면 파키오에 가서도 공부나 일을 해 볼 수 있어. 너를 맞이하는 가정은 그런 것에 꽤 개방적이신 분들이시거든. 결혼 후에 파키오에 적응하면 그런 기회를 주실 거다.”

“혼자서 해 보고 싶어요.”

“똑똑한 줄 알았는데 어리석구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지. 옳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은 아닐 수 있어. 후회할 때는 이미 늦어 버린다. 네 다음 후보는 샌이야. 지금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 아니?”

YO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루다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캤다. 인간은 대체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기 마련이다. 내 것일 수도 있는 것을 타인이 가질 때는 더더욱. 하지만 말간 은빛 홍채가 감싸 안은 동공은 단호했다. 


“알아요. 저는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죠. 그리고 샌은 오래도록 살아갈 테죠.”

똑똑하다는 인간도 어리석은 결정을 한다. 그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YO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다. 알겠지만. 너를 길러 주고 지원해 준 파키오 정부에 감사해야 해. 무엇보다 네가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건 네 스캔을 독점 구입해 주신 분 덕택이야. 그건 알고 있지?”

루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을 보고 YO가 말을 이었다.

“네가 뽑히는 걸 응원하신 그분께서 직접 주선하신 혼사다. 네가 파키오에 가게 되면 그분도 따님에게 맞는 새로운 스캔을 찾아야 해. 그럼에도 네 신랑감을 구해 주신 건 널 자식처럼 생각하셨기 때문이야. 네 미래를 염려하고 너를 아끼는 유일한 분이시지. 네 생사는 여태껏 그분에게 달렸었고, 너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그분께 있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겠다.”

명령에 가까운 부드러운 권고에 루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가장 성적이 좋으면 선택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메디움을 자진해서 선택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어. 메디움 이주권이 생긴 사람들이 간 거지. 너처럼 파키오 이주권이 생긴 사람들은 모두 파키오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단다.”

“정말 모두 그렇게 선택했나요? 모두 그렇게 원했나요?”

루다는 의미 없는 물음인 걸 알면서도 재차 물었다. 면담 시간이 지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어떻게 한담. 할아버지에게 약속했는데. 꼭 메디움에 가겠다고. 가서 삼촌을 찾아보겠다고.’

“파키오는 모두가 동경하는 곳이야. 당연한 거지. 아름다운 땅 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까. 자유롭게 살 자유를 선택하지 않으면 무얼 택하겠니?”


“하지만, 너를 돌봐주신 자애로운 분께 부탁을 드려보겠다. 물론 오래는 안 된다. 그렇게는 말씀드릴 수도 없어. 6개월……. 어쩌면 일 년 정도 메디움의 학교에 다녀보고 싶어 한다고 해 보겠다. 거듭 말하지만, 결정은 그분이 하신다. 집에 가 있으면 연락하마.”          

온전히 혼자 남겨졌을 때 루다는 열 살 남짓한 어린애였다. 그 나이의 여자애가 혼자 판매에 나서서 성공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루다를 선택해 주고 판매의 대가로 보내 주는 양식과 물품 모두 최고급으로 보내 주신 분. 

그분이 계셔 오래 묶은 종이처럼 파삭거렸던 루다의 피부는 하루가 다르게 뽀얗고 보드라워졌다. 어른들은 비단을 본 적도 없으면서 루다를 볼 때마다 비단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꼭 한 마디씩 덧붙이는 말이 한결같았다.

“그렇게 지원해 주는 고객을 만나면 우리 애도 올해의 신부가 텐데. 루다는 참 복도 많아.”

모두의 비아냥 섞인 부러움을 살 만한 지원과 혜택을 받은 만큼 그분이 반대하면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없음을 루다 역시 잘 알았다. 그러니 마음을 졸이고 또 졸일 수밖에 없었다. 삼촌을 어떻게 찾을지, 찾으면 뭘 해야 할지도 막막했지만, 삼촌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루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루다, 절대로 절대로 파키오에 가서는 안 된다.”

앙상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노인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쥔 루다의 작은 손도 함께 떨렸다. 진동이 가슴을 파고들어 맴을 도는 것 같았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아 노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온기가 돌지 않은 차가운 손에 루다의 손도 식어갔다. 입김을 불어보았다. 따스한 숨이 노인의 손에, 피부에, 가슴에 스며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이 손을 놓으면 다시는 잡지 못할 것이다. 정다운 손길이 아득해질 것이다. 루다는 그냥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루다는 점점 더 세게, 더 강렬하게, 더 깊은 입김을 토해 냈다. 


“루다, 그만. 그만 괜찮다.”

“하지만 할아버지, 춥잖아요. 이렇게 오들오들 떨잖아요.”

“아니다. 얘야. 두려워서 그런 거란다.”

“무엇이 두려우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너 혼자 살아갈 날들 말이다. 너의 미래를 함께해 줄 수 없으니.”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파키오가 돌봐줄 거예요.”

노인이 아주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열어놓은 1층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구부정하게 앉은 노인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벽에 기대어 앉은 노인이 기침을 할 때마다 빛 속에서 헤매던 먼지들이 풀썩거렸다. 힘들게 기침을 가라앉힌 노인의 쇳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누가 그러든?”

“YO가요. 며칠 전에요. 아빠가 이사 간 다음 날일 거예요. 그때 YO가 그랬어요. 꼬박꼬박 검사하고 법을 잘 지키면 파키오가 길러 주니 안심하라고요. 제게도 고객이 생길 거라 그랬어요. 그러면 조금 더 좋은 식량을 구할 수 있고, 그러면 할아버지도 더 건강해질 수 있어요.”

옅은 한숨과 함께 노인의 듬성듬성한 백발이 흔들렸다. 노인은 손을 내밀어 더듬더듬 루다를 찾아 끌어안았다.

‘가엾은 것.’

“루다, 꼭 기억해야 한다. 성인식을 치르면 반드시 메디움으로 가야 해. 가서 네 삼촌, 의래를 찾아. 의래가 널 도와줄 게야.”

“삼촌이 메디움에 살아요? 어디로 가야 해요?”


“할애비가 해준 이야기를 외우면, 잊지 않고 매일 외우면, 찾을 수 있단다. 메디움에 가면 이 할애비 말을 이해하게 될 거다.”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이야기를 외우면요?”

노인이 사력을 다해 흔들거리는 손을 들어 올려 루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염없이, 길고 긴 밤 내내, 동이 틀 때까지, 함께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물론이지. 넌 분명 찾게 될 거야. 하지만……. 너와 나만.”

“할아버지와 저만 아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미래의 제 아이에게 전할 이야기예요.”

“그래. 오래도록 전해질 이야기지.”


이제, 남은 힘이 없었다. 돌아가 누울 시간이다. 기어코 작별을 고할 시간이 오고 말았다. 

“얘야, 이제, 숨바꼭질도 끝날 때가 되었나 보다. 그만 올라가렴. 할애비는 내려가야겠다.”

루다가 황급히 노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어쩐 일인지 아까보다 더 손이 차가워진 것만 같았다. 눈물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되었다. 할애비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으니까. 소리 없는 통곡이 흘러넘쳤다. 쏟아져 내리기만 하는 눈물을 노인이 천천히 손으로 닦아주었다.

“루다, 울지 마렴. 이건 기뻐할 일이야. 축복받은 일이지. 할애비는 인간답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서 행복해. 그러니 울지 마라, 아가.”

울지 말라는 노인의 눈가도 축축해졌다. 하지만 이 순간이 태어나 살면서 가장 기쁜 순간임을 루다가 알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루다, 명심해. 너는 이 땅에서, 이 파트리아에서 임종을 지킨 첫 사람이야. 자, 이제 나를 일으켜다오.” 

 노인이 일어나 벽을 짚고 몸을 지탱하는 사이 루다가 바닥을 더듬거렸다. 시멘트 바닥에는 노인이 루다만 알 수 있도록 아주 가늘게 글자를 새긴 버튼이 있다. 손가락으로 더듬으면 살짝 패인 부분이 만져졌다. 가장 끝 글자를 누르자 아래로 내려가는 문이 열렸다.

“이제 인사해야지, 루다. 잘 가렴.”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루다는 할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웃으려 애썼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노인의 형체가 사라지고 암흑만 남았다. 루다는 우두커니 서서 암흑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혼자 남았다.

루다는 조명 빛이 환하게 밝은 위층으로 올라가 웅크리고 앉아서 바닥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작디작은 몸으로 커다란 카펫을 끌고 와 바닥문 위를 덮었다. 카펫 위에 앉아 아래층에서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벽에 기대어 앉았다. 카펫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 내며,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속으로 외웠다. 밤을 새워, 날이 밝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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