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초행자의 실시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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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벨기에 여행이 강행군이었음은 오늘 아침에 증명되었다. 이모집으로 복귀한 시각은 자정이 약간 넘었고 라면을 하나 먹은 후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매 아침마다 나가서 빵을 사오려던 계획은 두 번째 맞는 아침에 깨졌다.
세워두었던 오전 계획도 뒤로 남은 일정 어딘가에 끼워 넣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렇다고 오전 내 잠만 잔 것은 아니다. 약간의 늦잠 후 베란다에 앉아 도시를 감상하고, 아침을 먹고, 재원이와 대화를 나누며 느긋한 오전을 즐겼다. 일요일이니 그래도 된다.
느긋한 아침 일정에 따라 첫 일정은 이모가 다니는 교회 예배참석이 되었다. 최근 몇 주간 통 교회를 나가지 않은 죄책감을 파리에서 조금 덜게 되었다.
교회까지는 도보로 약 20여분, 이모는 먼저 출발했고, 나와 만두 윤형이, 그리고 재원이가 함께 후발대로 나섰다. 교회까지 걸으며 파리의 동네 풍경을 근거리에서 보았다. 일요일 오전 파리 12구는 경쾌하다. 여러 종의 과일, 채소가 진열된 시장은 성업 중이고, 모든 건물 모퉁이마다 있는 브라세리의 테라스에는 듬성듬성 손님이 차있다. 반팔을 입을 수 있는 마지노선 정도되는 기온은 걷기에 딱 알맞다.
예배는 결국 지각이다. 맨 뒷자리에 자리 잡았다.
많은 한국인을 본 것이 오랜만이다. 예배는 한국에서의 것과 차이가 없다. 천고가 높고,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이다 보니, 설교하는 목사님이 건물빨을 받는 감은 있다. 괜시리 더 경건하다.
오늘 일정은 재원이가 동행하여 운전을 전담한다. 차량 내 이모의 좌석은 2열로 옮겨졌고, 운전의 짐을 덜고 가이드 역할만 하게 되었다.
처음 가는 곳은 리옹역 주변이다.
서민층이 사는 동네라고 하는데 색을 예쁘게 칠한 벽이 인상적인 곳이다. 별다른 것 없이 아기자기하게 귀엽다. 집의 상태는 변변치 않지만, 파리에 살려거든 무릇 이런 곳이어야 된다고 할 만한 감성 넘치는 곳이다. 주거 환경의 포지션으로 굳이 한국과 비교한다면, 서울 시내 어딘가 다닥다닥 붙은 빨간 벽돌 구축 빌라촌 정도인데, 어느 관광객은 그곳에서도 카메라를 꺼내 들겠지?
그리고 관광객이 몰려들면, 주민들은 영문 모를 관심이 귀찮을 수도 있다.
이곳도 고충이 좀 있는지 아기자기한 문마다 촬영금지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그래서 사진도 몰래 뚝딱 찍고 빠져나와야 했다. 파리는 일종의 공인 신분이라 대중의 관심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논리의 비약을 머금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바로 리옹역이 보인다. 리옹역은 큰 시계탑을 포함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로 매우 크고 웅장하여, 모르는 사람이 봐도 파리 철도교통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드러난다.
역과 함께 번성한 주변의 상점가 및 식당들도 리옹역 체면에 걸맞게 멋지게 치장해 두었다.
뜨내기손님이 많은 역 주변은 음식 맛이 별로라고 하는데, 바로 옆에 빌라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골손님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리옹 역사와 주변 환경의 활약 덕에 역전 신호등 앞 포인트에서는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사진을 찍더라도 그림이 나온다. 우리는 중심축이 되어 몸을 돌리고, 이모가 콤파스의 바늘이 되어 쭉 돌며 십 수장의 사진 촬영을 이어갔다.
리옹역을 뒤로하고, 10여분 차량 이동을 하여 도착한 곳은 팡테옹이다. 프랑스의 명사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주로 문인, 사상가들 위주로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볼테르, 루소 등이 묻혀 있다고 한다. 한국에 현충원이 있기는 하나, 이는 앵발리드와의 유사성이 두드러져, 팡테옹과 대응되는 무언가를 찾기 어렵다.
팡테옹을 통해 프랑스의 여러 학문적 성취가 어떤 사회적 토양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엿볼 수 있다. 팡테옹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매번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격하게 감동하는 만만한 관광객의 입장을 내려두고 담백하게 설명하자면, 팡테옹 전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는 정문으로부터 50미터 이상 뒷걸음질 쳐야 한다.
주변에는 소르본대학과 도서관 등 학교 관련시설이 인접해 있다. 근처에는 명문 중고등학교와 그랑제콜 일부도 있다고 한다. 팡테옹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이 학문의 요람이자 무덤이고, 이 가치를 존중하고, 지키고 새로운 세대를 배양하기 위한 프랑스의 노력이 특히 돋보이는 공간이다.
파리의 관광지와 일반인 거주지역 간에는 구분이 없다. 팡테옹이라는 전 세계적인 명소 옆에는 일반가정집들이 늘어서 있고, 바로 앞 브레사리의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은 여느 동네와 다름이 없다. 문화유산과 동시대 현재가 함께 살아 숨 쉬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여 부럽다.
팡테옹에서 조금 내려와 소르본 대학 앞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조금 더 내려가니 뤽상부르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모든 것이 큼직큼직하여, 앞으로 정말 무지막지하게 크지 않고서야 크다는 표현은 줄이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적당한 크기의 뤽상부르공원은 아름답다. 이곳은 정말 현지인이 와서 쉬는 곳으로 관광객의 비중이 적고, 정말로 쉰다. 넉넉한 개수의 앉을 곳이 보장되어 있어 혼자 온 사람이든 여럿이서 온 사람이든 저마다 의자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서 일요일 오후를 만끽한다. 그늘 공간이 적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인데, 햇빛을 좋아하는 나에겐 큰 문제는 아니다. 잠을 자는 사람도 있고, 책을 읽는 사람, 친구와 수다를 떠는 사람 등 다양하다. 그 평화로움에 나도 슬쩍 끼어 현지인의 여유를 함께 즐겼다.
저 사람들도 내일 출근을 하겠지? 일주일을 버티기 위하여 이리도 필사적으로 쉬는 거겠거니.. 생각한다.
과거 프랑스의 왕과 귀족의 정원 사랑이 현대의 도시노동자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란 걸 그들은 몰랐었지 싶다. 관광객에게도 동일한 선물이다.
뤽상부르공원에서 재원이가 사준 커피만으로 허기를 달래기에는 부족하다. 이제 식사를 해야 한다. 팡테옹 주변 사이사이를 잠시 둘러본 후 (만두가 넷플릭스 드라마 촬영장소가 있는 곳을 보고 싶어 해 잠시 들러 사진을 찍었다.) 식사장소가 있는 중국시장 부근으로 차를 몰았다.
차이나타운이냐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니지만 거의.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어딜 가든 있는 차이나타운이 아직 변변치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다.
점심 메뉴는 베트남쌀국수다. 불어로는 똥끼노와
한국에서도 잘 안 먹던 베트남쌀국수를 파리의 중국시장에서 먹게 될 줄이야.
베트남쌀국수는 이미 추천을 받았었다. 먹었던 어떤 쌀국수보다 맛있었다는 생생한 증언이 육성으로, 인터넷 후기로도 들려왔다.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이력을 생각하면 개연성은 있다.
이모와 재원이의 추천에 따라 PHO14라는 쌀국숫집으로 갔다. 여기서부터는 종업원도 아시안이고 길에도 대부분 아시안. 사실 뭔지 모를 편안함도 있다. 나도 잠시 집 앞에 쌀국수 먹으러 온 현지인이 된다. 넉넉한 양의 쌀국수가 우리 앞에 놓인다. 국물이 시원하다. 여기 와서 몇 가지 맛있는 음식들에 행복하긴 했어도 뜨끈한 고깃국물 그리워질 시기가 벌써 왔었나 보다. 과연 맛은 좋다.
예상외로 푸짐한 양에 과하게 주문했던 것 아닐까 했지만 먹다 보니 또 거의 다 먹더라.
진짜 아시아였으면 빨리 먹고 자리 비워줘야겠지만 여기는 파리니깐. 국물 몇 스푼 남겨두고 수다를 시작했다.
이 날 점심의 수다 주제는 이모로부터 듣는 엄마의 옛날이야기? 어쩌면 나의 탄생비화일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전 세대로부터 듣는 내가 없던 시절의 목격담은 생생했다. 외할아버지 속 한 번 안 썩이고 살았던 것 같은 엄마도 그때는 그랬구나.. 하며 듬성듬성 알고 있던 40여 년 전 일을 비교적 세밀하게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모와 이렇게 이야기해 본 것도 처음인 것 같다. 그렇게 이역만리타국땅에서 가족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잊고 있던 가족 개념이 선명해지는 느낌도 든다. 수다를 떠는 사이 재원이가 이미 계산을 해두었다. 떨어져 있어도 가족이 맞다.
밥을 먹고 중국슈퍼에 들러 간단히 과일 몇 개 사고, 때마침 펼쳐져있던 벼룩시장 구경을 했다.
우리로 치면 동묘앞. 아니 그냥 동묘시장 자체
여기나 저기나 파는 품목들은 단합이라도 한 듯 동일하다. 시계에 선글라스에 식기류, 목걸이 각종 자질구레한 품목들은 동묘시장과 꼭 같다.
그리 동묘를 데려가도 본체 만 체 하던 그 품목들을 만두는 유심히도 본다. 결국에는 손목시계 하나를 득템 했다. 의아한 생각이 많이 들었으나 여행자의 사치로 생각하고 가만 두었다. 윤형이도 불어로 된 동화책을 사주고 싶다 하여 1유로에 중고 동화책 두 권을 샀다. 이 동화책들을 집에 와서 자세히 보니 불어가 아니라 스페인어다. 벼룩시장에 고지의무를 들이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스페인여행 다녀온 것으로 친다.
끝으로 주요 포인트들을 차로 한 번 쭉 도는 시간을 가졌다. 개선문, 루브르, 에펠탑 등의 명소들을 센강과 함께 따라가는 핵심요약 코스다.
스포를 당하기 싫어 곁눈으로 슬쩍슬쩍 보기만 했다. 슬쩍 보기에도 참 아름답지만.. 당당히 두 눈으로 보기가 꺼려진다. 여기는 내일이든 모레든와서 본격적으로 볼 거야.. 하면서 느낌만 취했다.
돌아오는 길은 극심한 교통 정체로. 파리 운전 만만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정정했다. 특히 비보호 좌회전이 기본 룰인 이곳에서는 맞은편 운전자와의 커뮤니케이션도 필수적으로 보인다. 이제사 앞유리 썬팅 안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납득이 된다. 나중에라도 파리에서 운전할 일 있으면 택시 타야겠다.
다시 한번 알찬 하루다.
내일부터는 우리만 남겨진다. 이미 원숭이 꽃신 신은 거 마냥 가이드투어에 적응됐는데. 잘할 수 있을런지..계획표부터 수정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