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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펜의 팬이다

–사라지는 라이팅의 감성에 대하여

by 언덕파

요즘 누가 펜을 사나요?
회의도 노트북으로, 메모는 폰으로, 카피도 키보드로 입력하는 시대인데.
그런데 나는 여전히 펜을 산다. 산다기보다 ‘모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집 근처 문구점 2곳과 사무실 근처 문구점 1곳.
나는 그 위치를 다 안다. 바쁜 일상 중에도 그 앞을 지나칠 때면
왠지 한 번은 꼭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건 충동이라기보다

“오늘도 너 잘 있니?”하고 펜들에게 안부를 묻는 행위다.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펜들이 진열대에 꽂혀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마음이 놓인다.
특히 펜심의 굵기가 0.38mm일 때… 어쩐지 카피도 얇고 날렵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나는 펜을 쓰는 사람이자, 펜을 믿는 사람이다. 책을 읽을 때도 손엔 늘 펜이 있다.

감명 깊은 문장엔 밑줄을 긋고, 생각이 튀어나오면 여백에 끄적인다.
폰에 저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손을 움직이는 그 순간에,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아침마다 읽는 경제신문에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부분엔 빨간펜으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줄을 긋고 동그라미도 그린다. 그 줄 하나가 오늘 하루의 통찰이 되기도 하고, 브런치 콘텐츠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나는 연필도 좋아한다. 언젠가부터 연필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다.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연필들이 서랍 속에 여러 자루 있다.
연필을 깎는 그 짧은 시간,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딱 그 연필심에만 집중하는 고요함이 좋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정적 속의 명상 같다.


형광펜은… 각성제다. 책상 위에 형광펜을 올려놓기만 해도 집중력이 올라간다.
라인 하나 그었을 뿐인데, 문장이 살아난다. 마치 “여기! 여기 집중하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회의 때, 나는 종종 만년필을 꺼낸다. 이유는 하나다.
공손하게 쓰기 위해서. 나는 전문가라는 자기 최면의 도구 같은 느낌이랄까.

미팅 때 타인의 말을 들으면서 메모를 할 때 만년필의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속도에 맞춰
내 생각도 천천히 정돈된다.

급한 필기는 볼펜, 가벼운 메모는 네임펜, 포스트잇은 얇은 젤펜,
그리고 스타벅스 다이어리에 필기할 땐 디자인도 감도도 있는 부드러운 펜을 쓴다.

이처럼 펜은 나에게 ‘글을 쓰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에 맞춰 선택하는 친구’들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에 바로 받아쓰기하고, 음성으로 검색하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시대다.

쓴다는 행위보다 입력하는 시대가 맞을지 모른다.
프랑스 유명한 펜 브랜드를 다니던 친한 후배조차 펜이 안 팔려 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펜보다 디지털 기기를 선호하는 시대, 하지만 나는 지금도 노트에 끄적인다.

아이디어가 더 잘 나와도 좋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무언가를 하얀 백지 위에 쏟아내는 행위 자체가 좋으니까.
멋진 한 줄 카피가 아니라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고, 갑자기 엉뚱한 단어 하나 써놓고 다시 밑줄 긋는

그 반복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게 아닐까.



키보드는 입력이고, 펜은 인생이다. 삶은 백스페이스로 지워지지 않는다.

타이핑은 빠르지만, 펜은 흔적을 남긴다. 쓰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그 과정에서 나는 생각한다.
기억하고,
반추하고,
때로는 후회하고,
다시 써 내려간다.

오늘도 펜을 든다. (자꾸 쓰다 보니 펜글씨가 멋스러워진다. 캘리그래피 부럽지 않다)
펜 부자로 사는 것,
이거 꽤 괜찮은 인생이라 생각한다.



1.jpeg 펜마다 성격이 있다. 지시할 때는 네임펜, 설득할 때는 볼펜, 감탄할 땐 형광펜, 머뭇댈 땐 연필. 카피라이터의 필통은 말투의 확장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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