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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체의 화법은 늘 단호하다

서울 골목에 붙은 ‘주차금지’의 말투를 읽다

by 언덕파

요즘 저녁 식후 20분 정도 산책을 한다.

하나의 루틴이 생겼는데 골목을 걸을 때마다 주변 사물들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중 하나. 주택가 골목의 벽을 본다.

간판도 아니고, 그라피티도 아니고, 그저 종이에 인쇄되어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경고문’을 말이다.

"외부차량 주차금지"
"견인조치함"
"차량파손은 자차부담"
"잠시 주차도 안 돼요!"
그리고, "서로 얼굴 붉히지 맙시다!"

서울의 벽은 말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보이는 문장은 단연, '주차금지'다. 심지어 집집마다 버전이 조금씩 다르다. 말투도, 글꼴도, 어투도 제각각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경고문에도 캐릭터가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 말투의 다양성이다. 어디는 <강제 견인 조치>라고 선언하고, 어디는 <잠깐도 안 돼요>라며 감정에 호소한다.

심지어 어떤 경고문은 아주 다정하게 <배달차량은 괜찮습니다>라고 유예 조건까지 건넨다.

이 경고문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집의 성격이 어렴풋이 보인다.
어떤 집은 분노했고, 어떤 집은 참다 참다 붙인 것 같고, 어떤 집은 그냥 한 번은 말해두고 싶은 것 같다.



흥미로운 건, 이 경고문들 대부분이 고딕체라는 점이다. 시리도록 단정한 고딕체는 이상하리만치 명령조에 잘 어울린다. 광고 특히 지면광고의 헤드라인으로도 많이 쓰이는 폰트다. 눈에 잘 띄고 강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산세리프 계열의 이 폰트는, 감정 없는 표정을 한 채 <절대 안 돼>를 말하기에 최적화돼 있다. 아마도 디자인하는 누군가는 ‘고딕체=금지의 언어’라는 공식을 스치듯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고문은 노란 바탕에 검정/빨강 글씨다. 색이 주는 경계심은 무시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스쿨존 앞에서 봤던 그 조합처럼, 사람은 빨강과 노랑 앞에선 잠시 멈칫하게 된다.

어느 날은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서울은 왜 이렇게 금지할 게 많을까?’
그것도 굳이 벽에 써 붙여야 할 만큼. 아마도 이런 경고문들은 일종의 대신 말해주는 장치일 것이다.

직접 마주쳐서 말하긴 싫고, 막상 적발해도 얼굴 붉히긴 싫고, 하지만 분명히 말은 해두고 싶은 상황.


그래서 이 종이들이, 벽들이, 대신 말한다.

"이건 내 공간이야. 들어오지 마."

이게 단지 주차문제일까? 나는 여기에 ‘도시의 신호’를 본다. 공존 대신 경계를 택한 사람들의 흔적.
모든 게 빠르고 복잡한 세상에서 ‘잠깐이면 괜찮겠지’라는 기대가 ‘아예 하지 마세요’로 대답되는 현실.

주차금지 문구는 그 자체로 이 도시의 태도와 불안을 드러내는 표정 같았다. 서울이, 혹은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증거 말이다.




KakaoTalk_20250718_115732168_01.jpg 기둥 위에도 벽은 있다. 그리고 벽 위에도 문장은 있다
KakaoTalk_20250718_115732168_02.jpg 테이프까지 격앙돼 있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 도착한 경고문
KakaoTalk_20250718_115732168_03.jpg 말투는 조금 다정했지만, 결론은 똑같다. 안 돼요



서울 시내 어딜 가도 폰트의 홍수다. 다양한 서체들이 간판에 메뉴판에 도로명에 박혀있다.

서울 골목은 늘 말이 많다. 그중에서도 제일 목청 큰 말은 이거다.

<외부차량 주차금지>

붙이면 누가 들어줄까 싶어도, 그냥 벽이라도 믿어보는 거다.

오늘도 누군가는 고딕체로 인쇄한다.
'경고'라는 감정을.



[한 줄 카피]

서울 골목의 벽엔, 분노 대신 고딕체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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