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보다 느리고, 칼보다 안전한
택배 박스를 열 때면 늘 찾게 되는 것이 있다.
익숙한 커터칼.
어느 집에나 한두 개씩 있는 흔한 칼이다.
작지만 날카롭고, 빠르다.
박스 안에 내용물이 궁금할 지경이니 언박싱은 최대한 빠른 게 좋다.
쓱 그으면 절반은 잘려 있고,
그렇게 박스를 ‘처리’하듯 오픈한다.
그런데 어느 날, 달리기 동호회 지인이 선물 하나를 건넸다.
작고 둥근 플라스틱 조각.
모양은 달팽이, 쓰임은 이게 뭐지?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냉장고에 앙증맞게 붙여놓는 액세서리인가?
한참을 요리조리 훑어보다가 짐작이 가지 않아서 지인께 물어봤다.
'박스 오프너'였다.
처음엔 웃음부터 나왔다.
'이걸로 박스를 자를 수 있다고?'
귀엽긴 한데 실용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번 써보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다. 완전히.
이 쬐끄만한 게 못 여는 박스가 없다.
그 뾰족한 앞니 하나로
어지간한 박스 테이프는 매끈하게 갈라졌다.
심지어 테이프를 가르는 동안엔 칼날이 보이지 않는다.
달팽이 아랫배에 조용히 숨겨져 있다. 티 나지 않게 고요히 처리하는 것이다.
절단이 아니라, 개봉.
찢는 게 아니라, 여는 감각.
처음엔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했던 이 도구가,
자꾸 손이 갔다. 냉장고에 어엿하게 당당하게 부착되어 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언박싱 순간의 즐거움을 매우 스무스하게 제공해 준다.
심지어 어머니께도 드렸는데,
그 뒤로는 다른 건 안 쓰신다.
손에 착 감기고, 위험하지 않아서 좋다고 하셨다.
드르륵- 드르륵- 커터칼의 소리가 뭔가 날카롭게 들린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다시 깨달았다.
속도보다 중요한 건 방식이라는 걸.
커터칼은 다 보인다.
어디가 날이고, 어디가 위험한지.
그 날카로움을 보이는 대신, 조심을 요구한다.
하지만 달팽이 오프너는 달랐다.
무언가를 자르고 있음에도 칼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작은 달팽이 등껍질 아래쪽에서 조심스레 나온 뾰족이 하나가
슬며시 테이프를 잘라준다.
박스를 여는 동안,
그 조용한 움직임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급하지 않아도 돼요.
서두르지 않아도 열려요.”
택배를 개봉하는 그 짧은 찰나,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방식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느리지만 안전하고,
조심스럽지만 정확한 방식.
그걸 달팽이 오프너가 담담히 가르쳐준다.
조심스러운 게 더 깊은 배려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커터를 경험하던 초기에
문득 광고회사 이노션의 오래된 공익광고가 떠올랐었다.
택배 박스 테이프 위에 동물들을 그려 넣은 캠페인.
너무 당연하게 칼로 테이프를 가르려는 순간,
그 테이프 위에 동물이 있다는 걸 잠깐이라도 생각하게 만들었던 광고였다.
그건 커터의 사용법이 아니라
배려의 사용법을 가르쳐 준 크리에이티브한 광고였다.
그 광고와 이 달팽이는
기묘하게 닮아 있다.
어떻게 자를 것인가'보다,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묻는 방식.
그건 꼭 박스에만 해당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광고도 같다.
화려한 연출, 강한 메시지, 빠른 정보 전달.
그런 것들이 경쟁처럼 오가는 시대지만,
가끔은 천천히, 조용히, 다정하게 말하는 브랜드가 기억에 남는다.
묻히지 않으려 목소리를 키우는 대신,
칼끝을 숨기고도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다.
찢지 않아도,
때리지 않아도,
소리치지 않아도
충분히 열리는 마음이 있다.
광고는 결국,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이다.
그 말을 어떻게 꺼내느냐가
그 브랜드의 태도를 말해준다.
<한 줄 카피>
“칼끝이 보이지 않을수록, 배려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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