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준비 없는 욕심은 허망하다

– 챔피언 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by 언덕파

퍼팅그린에서 몸을 풀고 있던 어느 날, 옆 홀 티박스에서 묘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곳은 챔피언 티, 소위 ‘풀 백티’였습니다. 골프장 가장 뒤쪽에 위치한, 길고 위압적인 티박스. TV에서 보는 프로들이 서는 자리. 평범한 아마추어라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성역 같은 곳이죠. 그날은 외모만 보면 “고수 아닐까?” 싶은 네 명이 풀 백티에 올라서더군요. 드라이버를 번쩍 들고 멋지게 어드레스를 하는 모습은 꽤나 그럴싸했습니다. 저는 슬쩍 퍼팅 연습을 멈추고 그들의 티샷을 지켜봤습니다.

첫 번째 골퍼, 임팩트 순간 심한 슬라이스. 볼은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골퍼, 탑핑. 힘없이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세 번째 골퍼 역시 탑핑, 간신히 페어웨이 초입까지 데굴데굴. 마지막 네 번째 골퍼는 겨우 전방으로 띄우는 데 그쳤습니다. 멋져 보였던 티박스의 분위기와 달리, 실제 샷은 초라하게 흘러갔습니다. 그 순간,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챔피언 티에 설 자격은 무엇일까?”


챔피언 티, 자존심의 상징

골프장에서 챔피언 티는 흔히 남자 골퍼들의 자존심 같은 자리입니다. 화이트 티나 블루 티는 대중적이지만, 챔피언 티는 마치 “고수의 증명”처럼 여겨지죠. 아마추어 골퍼들 사이에도 이런 분위기가 있습니다.

“형, 오늘은 풀 백티에서 가자.”
“에이, 우리도 한 번쯤은 뒤에서 쳐봐야지.”

자의든, 동반자의 부추김이든, 허세든 간에 한 번쯤 서보게 되는 자리. 처음엔 설렘과 기대가 반. 하지만 막상 스윙을 하고 나면, 후회와 허망함이 밀려옵니다. 현타가 세게 옵니다. 일단 챔피언티에 서면 화이티에서 바라보는 홀 레이아웃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저 계속 너머까지 내 볼이 넘어갈 수 있을까, 넘어갔다 해도 그린까지 가려면 긴 채를 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우왕좌왕하다가 앞팀을 못 따라가지는 않을까. 자존심은 온데간데 없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챔피언 티입니다.


챔피언 티가 어려운 이유

챔피언 티에서 좋은 샷을 하기 어렵다는 건 단순히 거리가 길어서만은 아닙니다.

1) 거리의 압박 : 티샷이 200m도 못 미치면 세컨드샷은 절망적입니다. 드라이버가 곧잘 맞는다고 해도, 챔피언 티에 서면 그 차이는 체감 이상으로 큽니다. 보통 티 박스의 단계별 차이는 15미터 정도 되는데, 체감은 더 길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2) 정확성의 필요 : 긴 코스일수록 작은 미스가 큰 벌타로 이어집니다. 숲, 해저드, 벙커가 연달아 기다리고 있죠.

3) 멘털의 흔들림 : 뒷티에 섰다는 자부심은 곧 부담으로 바뀝니다. “여기서 잘못 치면 다 망신인데…”라는 생각이 스윙을 흔듭니다. 티박스의 격에 맞는 타격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의외로 크게 작용됩니다.

4) 매너의 무게 : 괜히 뒤에서 헤매다 동반자들의 흐름까지 끊어버리면, 실력 이전에 기본 태도 문제로 보입니다. 진행 속도와도 연관이 있죠. 캐디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눈빛은 '빨리 화이트 티로 내려오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챔피언 티는 단순히 ‘길게 만든 티박스’가 아니라, 준비된 골퍼에게만 열리는 무대인 셈입니다.


반전의 아이러니

재미있는 건, 챔피언 티에 서 있는 모습만 보면 누구나 고수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뒤쪽 티잉 그라운드에서 어드레스를 취하고 드라이버를 휘두르는 모습은 꽤나 근사합니다. 하지만 볼은 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겉모습은 웅장해도, 결과는 초라할 수 있습니다. 이 반전이 바로 챔피언 티의 아이러니입니다. 겉멋으로는 버틸 수 없는 자리. 허세가 쉽게 무너지는 자리. 저 역시 챔피언 티에서 여러 번 무너졌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멀리 남는 세컨드샷, 더 좁아 보이는 페어웨이, 더 높은 긴장감. 결국 평소 루틴이 깨지고, 후회가 남게 됩니다. “괜히 뒤로 갔어.” “차라리 블루 티에서 칠 걸.”(블루티라고 만만할까요) 그 순간 깨닫습니다. 준비 없는 욕심은 결국 허망하다. 챔피언 티는 나를 더 멋져 보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약점을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스레드에 챔피언 티 글을 올렸더니 어느 골퍼가 이런 댓들을 다셨더군요, '깝죽거리지 말자' 정확한 표현이어서 하트 눌러드렸습니다. 노력 없이는 깝죽거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또 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경험을 하고도 우리는 또 챔피언 티에 서보려 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인간 본성일 겁니다. 한 번 무너져도,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 혹은 언젠가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실패는 허망했지만, 그 순간조차 골프의 묘미로 남습니다. 골퍼라면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챔피언 티는 허세와 욕심의 자리이자, 성장의 동기 부여가 되는 자리입니다.


골프장의 챔피언 티 경험은 삶의 장면과도 닮아 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욕심으로 앞서 나가면, 오히려 더 초라해집니다. 멋있어 보이려 욕심낸 자리가, 오히려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 버립니다. 회사에서, 관계에서, 혹은 도전의 무대에서. 준비 없는 욕심은 허망합니다. 하지만 준비된 도전이라면, 그 무대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챔피언 티는 남자들의 자존심이자, 준비된 골퍼의 무대입니다. 허세로 서면 허망해지고, 준비되어 서면 영광이 됩니다.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티에서 칠 준비가 되어 있나?”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보고 싶네요. “챔피언 티? 허세는 멀리, 볼은 더 멀리.”



백티2.jpeg “챔피언 티? 허세는 멀리, 볼은 더 멀리.”






#언덕파다이어리 #챔피언티 #골프라운드 #골프심리 #골프매너 #준비없는욕심은허망하다
#언덕파 #정카피 #골프철학 #비사이드웍스

keyword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