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호보다 노출, 완벽보다 버팀
가을이다. 근데 마치 여름 장마처럼 비가 이어지고 있다. 비가 내린 다음날이었다. 출근길에 좁은 골목을 지나는데 벽을 따라 화분들이 서 있었다. 도자기, 페인트가 벗겨진 플라스틱, 금이 간 항아리까지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잎은 모두 반질반질했고, 줄기엔 물기가 반짝였다. 누가 가꾼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잘 자라 있었다. 보통 식물은 거실 창가나 베란다에서 키운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일정한 물과 햇빛이 맞춰진 환경 속에서. 하지만 골목의 화초들은 그런 보호를 받지 않는다. 비가 오면 젖고, 바람이 불면 쓰러지고, 햇빛이 강하면 타버린다. 누군가 물을 주지 않아도 버티고, 누군가 발로 스쳐도 다시 일어난다.
애지중지 키운 식물보다 오히려 더 싱싱해 보였다. 온실의 식물은 환경이 완벽하다. 그 완벽함이 오히려 약함을 만든다. 조금만 온도가 달라져도 시들고, 습도가 높아지면 잎이 떨어진다. 보호받는 대신, 스스로의 면역력을 잃는다. 몇 해 전, 이사하면서 거실에 해피트리 화초를 키운 적이 있었다. 몇 개월도 못 가 말라서 시들시들해져 버렸다. 나름 물도 열심히 주고 돌봤지만 경험이 없어서인지 녀석을 잘 키우지 못하고
버리게 되었다. 이후 거실에 화초를 키우지 않는다. 사무실에도 화초 선물이 오면 걱정부터 앞선다. 잘 못 보살필까 봐서. 화분들이 놓여있는 골목을 걷다가 과거의 이런 흑역사들이 떠올랐다.
골목의 식물은 왜 이리 건강해 보일까. 짧은 생각으로 이유를 생각해 봤다. 이 녀석들은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균형을 배운다. 비바람에 휘어지며 줄기를 단단하게 만들고, 햇빛이 부족하면 방향을 바꿔 빛을 찾는다. 누가 돌보지 않아도, 살아남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낸다.
사람도 비슷할 것이다. 안정된 환경에서만 머물면 오래는 가지 못한다. 예측 불가능한 바람이 불 때, 그 안에서 방향을 잡는 법을 배운다. 고된 시절은 피하고 싶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많이 단단해졌던 때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균형감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온실은 예쁘다. 하지만 닫힌 공간이다. 공기 흐름이 일정하고, 바람이 통하지 않는다. 골목은 거칠다. 그러나 열린 곳이다. 누군가 지나가고, 바람이 드나든다. 그 무심한 통로 속에서 식물은 스스로 자리를 찾는다.
골목의 화분들은 도시의 작은 생태계다. 누군가 버린 항아리 속에 심긴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누가 주인인지 몰라도, 그 존재는 확실히 살아 있다. 그건 관리보다는 생명력의 결과다. 한 번은 산책을 하다가 작은 정원을 본 적이 있다. 정말 작은 사이즈다. 공원이 아닌 정원.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휙 둘러보자면 5분도 안 되는 좁은 땅이다. 모르고 스쳐가는 사람들도 많다. 찬찬히 바라보니 이 녀석들도 비바람을 매일 맞고 자라고 있었다. 좁은 땅이 마치 작은 화분 같았다. 하나같이 씩씩해 보였다.
“나는 보호받지 않아도 자랄 수 있다.”
“비를 맞고 나면 더 푸르러진다.”
그 말이 꼭 식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도, 브랜드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자란다. 완벽한 조건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고, 지속적인 관심보다 강하게 버티는 체력이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바람을 맞는다.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뜻하지 않은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조금씩 단단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바람은 우리를 부러뜨리기보다, 뿌리를 깊게 만든다. 완벽하게 관리된 환경은 편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불완전한 환경에서 버텨낸 경험이 오히려 오래 남는다. 관리보다 버팀, 완벽보다 생존. 그게 오래가는 힘이다. 비바람이 키운 것들. 그건 식물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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