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고를 만드는 나, 광고를 건너뛰는 나
요즘은 뭐든 건너뛸 수 있다. 영상은 10초 앞으로, 음악은 후렴부터, 드라마는 하이라이트로. 심지어 유튜브 광고도 이제 5초만 기다리면 사라진다. ‘스킵 가능한 시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기다림이 사라지고, 순간의 집중이 분절되어 버렸다. 그런데 문득 생각한다. 나는 광고인이지만, 동시에 스킵을 누르는 소비자다. 누군가의 공들인 15초를 무심히 넘긴다. 카피를 쓴 사람의 마음을 알면서도, 지루해 보여서, 급해서, 이미 봤던 형식이라서라는 이유로... 이건 직업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반사신경 같은 것이다.
예전엔 기다림이 있었다. TV 광고를 보며 “본방송 언제 시작하지?” 하며 리모컨을 움켜쥐던 시절. 그때 광고는 하나의 ‘중간 쉼표’였다. 광고를 보며 화장실도 다녀오고, 라면 물도 올리고, 잠깐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림이 퇴화했다. 무언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OTT, 유튜브, 인스타 릴스… 모두 ‘즉시 재생’과 ‘건너뛰기’를 전제로 한다. 콘텐츠가 쏟아질수록 선택의 피로도는 커지고, 사람들은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림 자체를 ‘비효율’로 본다.
스킵은 편리하다. 하지만 동시에 ‘선택의 피로’를 만든다. 모든 순간을 내가 직접 조정해야 한다. 언제 멈추고, 언제 넘길지 판단해야 한다. 그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쓴다. 예전엔 방송국이 편성표를 정했다.
이제는 내가 내 인생의 편성표를 짠다. 스킵이 자유를 주는 동시에,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이유다.
요즘 광고는 ‘보여주는 것’보다 ‘멈추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더 이상 광고를 ‘시청’ 하지 않는다.
그저 스킵 여부를 결정할 뿐이다. 그 3초 안에 판단이 끝난다. 그래서 요즘 카피는 “읽히는 문장”이 아니라 “멈추는 문장”이어야 한다. 음악, 텍스트, 컬러, 표정, 리듬… 모든 요소가 ‘스킵’을 막기 위한 설계다.
아이러니한 건 광고인인 나조차도 광고를 스킵한다는 사실이다. ‘이거 어디 제작이지?’ ‘어떤 브랜드 카피야?’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도 그다음엔 손가락이 먼저 움직인다. 이건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패턴’의 문제다.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기대, 호흡, 상상, 여운이 함께 들어 있다. 그게 사라지면 감정의 밀도도 얕아진다. 음악의 도입부가 사라지고, 영화의 여백이 사라지고, 사람의 대화도 속전속결이 된다. 광고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의 광고는 “한 줄 요약”이 되어야 한다. 그 한 줄 안에 감정, 맥락, 스토리, 이미지가 압축되어야 한다. 그래서 짧아졌지만 동시에 더 어려워졌다. 짧은 문장 안에 진짜 마음이 들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알아차린다. 그리고 스킵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스킵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스킵되지 않는 경험’을 찾는다. 좋은 공연, 영화관의 사운드, 누군가와의 대화, 손으로 쓴 편지와 낙서 같은 것들. 그건 시간을 버는 게 아니라 시간을 느끼는 일이다. 콘텐츠가 아무리 빨라져도 사람의 감정은 여전히 느린 속도로 반응한다. 그 느림을 설계할 줄 아는 브랜드, 그게 강한 브랜드다. 브랜딩은 결국 ‘머무름’의 기술이다. 사람이 한 번이라도 멈추게 만들 수 있다면 이미 성공이다. 광고는 클릭보다 체류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카피를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에서 “다음으로 넘기지 않게 만드는 문장”을 써야 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건 문장이 아니라 멈춤의 설계다.
광고를 만들면서 동시에 스킵을 누르는 나. 그 모순이 오히려 현실을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광고는 소비자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소비자의 패턴을 따라 배우는 것이다. 사람은 이제 설득되지 않는다. 단지 끌릴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카피를 쓸 때 이렇게 물을 때가 많다. “이 문장은 누군가의 손가락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스킵’이 기본값인 세상에서 산다. 하지만 결국 멈춰서 듣고, 기다려서 느끼는 사람만이 깊이 소비하고 오래 기억한다. 좋은 브랜드, 좋은 콘텐츠, 좋은 사람은 반대로 기다림의 미학을 가르친다. 스킵할 수 없는 순간을 만든다. 스킵이 일상이 된 시대, 멈춤이 경쟁력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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