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에 남겨둔 사진들

- 보여주지 않아도 남는 이야기

by 언덕파

오늘은 몇 장 찍었을까. 스마트폰을 열고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는 장면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 해가 기울던 공원, 초점이 흐릿한 하늘, 누군가의 뒷모습. 그 사진들을 보면 늘 비슷한 생각이 든다.

“이건 왜 아직 지우지 않았을까?”

사진첩을 정리할 때마다 두 부류로 나뉜다. 딱 떨어지는 피사체, 완벽한 구도, SNS에 올렸던 사진은 쉽게 지운다. 이미 세상에 보여줬고, 이제는 내 역할이 끝났다고 느껴서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조금 어설프고 흔들린 사진은 지우지 못한다. 그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이 아니라 나만이 기억하는 감정의 원본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기록을 위해 사진을 찍지만 사실은 감정의 보관을 위해 찍는다. 기억은 언제나 감정의 프레임 속에서 남는다. 그러니까 사진의 초점이 흐릿해도 그 안의 마음만은 선명하게 남는 것이다. 그때의 기분, 냄새, 온도 심지어 들려오던 소리까지. 모두 사진 속에 미세하게 녹아 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보면,

그때의 나와 눈을 마주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진을 지운다는 건 단순히 이미지를 삭제하는 게 아니다. 그때의 나를 한 번 더 보내는 일이다. 어설펐던 나, 흔들리던 나, 누군가를 향해 웃던 나. 이 모든 조각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래서 삭제되지 않은 사진에는 의외로 많은 자기 이해의 단서가 들어 있다. 그건 과거의 증거이자 현재의 거울이다.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다. 남겨둔다는 건, 단지 나를 이해하려는 방식일 뿐이니까.

사진첩이 무한으로 확장되면서 우리의 기억도 가벼워졌다. 필름 시절엔 한 장을 찍기 위해 망설였지만 지금은 하루에도 수십 장을 찍는다. 그만큼 사진은 풍부해졌지만, 기억의 밀도는 옅어졌다. 모든 순간이 기록되지만, 정작 의미 있는 장면은 찾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요즘은 삭제의 기술이 필요하다. 무엇을 버릴지, 무엇을 남길지 선택하는 감각. 결국 남겨진 몇 장이 나의 진짜 스토리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브랜딩을 하다 보면, 늘 ‘보여주는 이미지’에 집중하게 된다. 로고, 색상, 톤 앤 매너, 카피, 콘텐츠. 모두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진짜 브랜드는 보여주지 않는 부분에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고객이 보지 못하는 내부의 메일 톤, 팀이 회의에서 쓰는 단어, 문제 상황에서 드러나는 태도. 이건 공식 사진이 아니라 브랜드의 비공식 사진첩 같은 것이다. 사람이 지우지 못한 사진을 통해 진짜 감정을 확인하듯, 브랜드도 남겨둔 흔적을 통해 그 본심이 드러난다. 결국 브랜딩의 본질은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감정의 일관성이다. 완벽한 장면보다 진심이 남는 장면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다.

말 나온 김에 요즘의 브랜딩을 잠깐 들여다본다. 자주 드는 생각은 점점 보여주는 기술에 집착한다는 것. SNS 콘텐츠, 캠페인 영상, 타깃 세그먼트, 해시태그 전략.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남겨두는 브랜드를 찾는다. 즉, 콘텐츠가 끝나고 난 뒤에도 그 브랜드가 떠오르는 경험 같은 거. 광고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있어도 기억에 남는 건 광고가 아니라 태도다. 그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게 브랜드의 사진첩에 남는다. 마치 사진첩 속 흐릿한 한 장처럼, 보여주려 찍은 게 아니라 살면서 자연스럽게 남은 장면. 그것이 브랜드의 인간성이다.

어쩌면 사람과 브랜드는 닮아 있다. 둘 다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은 남겨둔 것들로 기억된다. 내 사진첩 속 삭제되지 않은 장면처럼 브랜드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제품보다, 문장보다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 하나의 느낌. 그것이 바로 브랜드의 삭제되지 않은 진심이다.

우리는 늘 보여주려고 한다. SNS에 올릴 사진을 고르고, 프로필을 다듬고, 더 잘 나온 장면을 편집한다.
타인 보다 상대적으로 더 우위에 있어보이려는 순간들. 그것이 취미로 하는 스포츠든 생업으로 삼는 업무이든 말이다. 하지만 진짜 나를 보여주는 건 어쩌면 지우지 못한 사진들이지 않을까. 혼자서 노력하고 즐기거나 느려도 담담히 나아가는 B컷의 순간들... 완벽한 순간이 아니라 조용한 시간 속의 솔직함. 브랜드도, 사람도 결국 같은 원리다. 완벽히 보여주지 않아도, 완전하지 않아도 진심은 남는다.


가끔은 사진첩을 스크롤하는 그 시간이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 같다. 하루 날을 잡아 빼곡히 쌓인 컷들을 일일이 열어본다. 이걸 왜 찍었지? 왜 아직 안 지웠을까? 아, 이게 여기 있었네? 마음속 반응은 사진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무심히 찍은 장면들이 결국은 내가 살아온 기록이다. 어쩌면 사진첩이라는 단어는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마음의 지도일지도 모른다. 어느 화재보험 광고의 카피처럼 내 마음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기록에도 마음이 산다. Delete 하지 못한 건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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