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수납장을 열어보면 이상하게 빵빵한 서랍이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쇼핑백이 가득하다. 종이로 된 백, 비닐백, 브랜드 로고가 찍힌 두꺼운 백, 여행 중에 받아온 낯선 디자인의 백들까지. 서로의 손잡이가 엉켜 얽혀 있는 모습은 마치 기억의 끈 같다. 놀랍게도 그 대부분은 단 한 번도 다시 쓰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데도 그걸 버리진 못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쇼핑백을 버리지 못하는 건, 물건 때문이 아니라 그때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내가 유독 오래 두는 쇼핑백엔 일정한 기준이 있다. 예쁘거나, 튼튼하거나, 그날의 기분이 남아 있는 것들이다. 다이소에서 산 물건을 담아 온 무지 쇼핑백은 심플한 디자인이 좋아서, 올리브영 종이백은 두꺼운 질감이 마음에 들어서, 택배로 온 고급 브랜드 백은 언젠가 선물할 때 써야지 하면서 쌓아두게 된다. 하지만 그 언젠가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결국 쇼핑백은 쌓이기만 하고, 나는 그걸 한 번도 ‘다시’ 쓰지 못한 채 수납장 안에 가둬둔다.
유독 버리지 못하는 것 중엔 여행지에서 가져온 쇼핑백이 있다. 10여 년 전, 뉴욕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의 ‘LITTLE BROWN BAG’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갈색 종이백 하나가 마치 뉴요커의 상징처럼 보이던 시절. 나도 한때 그걸 탐냈었다. 지금은 사라진 브랜드 딘 앤 델루카의 흰색 캔버스백도 마찬가지다.
뉴욕 출장 중 잠깐 들른 딘 앤 델루카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고 받은 그 백은 단순한 장바구니가 아니라 하나의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그 백을 한동안 한국에서도 들고 다녔다. 출근길, 근처 마켓, 주말 카페에서도 그 백을 들면 왠지 모르게 내 하루가 조금 더 세련돼 보였다.
얼마 전엔 토론토에 다녀온 누나가 쇼핑백 하나를 툭 건넸다. 푸드 베이직스라는 캐나다의 창고형 슈퍼마켓 로고가 찍힌 녹색 에코백. 그건 명품도 아니고, 특별히 고급스러운 재질도 아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심플하게 디지안된 백을 쉽게 놓지 못했다. 간단히 동네 마트에 갈 때나 커피를 사러 나갈 때 들고 다니며 에코백의 가치를 잠시나마 느꼈다. 덤으로 여행지에서 가져온 쇼핑백은 그 나라의 공기, 거리의 온도, 나의 감정까지 함께 담아 온다.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단순히 물건을 담았던 게 아니라, 순간을 담은 백이기 때문이다.
광고를 오래 하다 보니 다양한 쇼핑백을 보면 브랜드로서 여러 맥락이 보인다. 쇼핑백은 브랜드의 얼굴이다. 로고, 질감, 색감, 활자의 간격 하나까지 그 브랜드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좋은 쇼핑백은 그 자체로 훌륭한 디자인 오브제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그 이후다. 그 쇼핑백이 내 손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브랜드가 아니라 나의 물건이 된다. 거실 한쪽에 쌓인 백들을 보면, 그건 루이비통도, 무인양품도, 블루밍데일스도 아니다. 그냥 내가 버리지 못한 종이백들이다. 나는 그 백들을 볼 때마다 내 취향의 변화를 느낀다. 예전엔 로고가 크고 화려한 백을 좋아했다면 지금은 무채색의 단정한 백을 더 오래 둔다. 쇼핑백이 변한 만큼, 나의 미감도 바뀌었다는 뜻이다.
나는 왜 쇼핑백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이유는 단순하다. 이건 좋은 종이야, 이건 언젠가 쓸 수 있겠지, 이건 버리기엔 너무 예쁘잖아... 이런 이유들은 사실 물건의 가치가 아니라, 감정의 무게다. 그때의 순간, 함께 있던 사람 혹은 그날의 나를 버리지 못하는 마음일 것이다. 쇼핑백을 정리한다는 건 결국 내 기억의 일부를 정리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누군가는 예쁜 디자인 때문에, 누군가는 두꺼운 질감 때문에 또 누군가는 단지 버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겨둔다.
수납장 속 쇼핑백들은 나의 소비 히스토리이기도 하다. 한때 자주 가던 가게, 좋아하던 브랜드, 충동적으로 산 날의 흔적까지 다 들어 있다. 그 백들을 꺼내보면 내 과거의 취향이 보이고, 그 취향은 세월과 함께 변해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공존하는 장소, 그게 수납장 안의 쇼핑백들이다.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여름, 이사를 앞두고 마음먹고 쇼핑백을 정리했다. 오래된 것들을 과감히 버렸다. 남은 건 몇 장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중 하나가 딘 앤 델루카였다. 이미 브랜드는 사라졌지만, 그 백은 여전히 내 일상 속에 남아 있었다. 그걸 버리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건 브랜드가 아니라, 나의 한 시절이었다. 젊은 날의 열정, 출장으로 혹은 여행으로 걸었던 뉴욕의 거리, 카페의 공기. 그 백은 종이가 아니라 시간의 표면이었다. 버림보다 더 어려운 건 남겨둠의 기준이다. 무조건 비우는 게 능사는 아니다. 버리지 않아야 비로소 남는 기억도 있다.
수납장 문을 열어본다. 이사 이후 하나둘씩 쇼핑백이 또 쌓여있다. 버리기로 마음먹었던 올리브영 종이백도 그대로 있다. 딘 앤 델루카는 여전히 깨끗하고, 푸드 베이직스 백은 구김이 가고 손잡이가 살짝 해졌다. 브랜드의 이름은 잊혀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쇼핑백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기억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건 단점이 아니라, 삶을 조심히 다루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비사이드웍스 #나는B를좋아합니다 #쇼핑백이야기 #일상관찰 #브랜딩감성 #기억의디자인 #소비와기억 #종이의철학 #남겨둠의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