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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이 졸업식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

by 다니니



얼마 전 첫째 아이의 졸업식이었다.


"졸업생 들은 부모님에게 감사하단 인사와 함께 편지를 전달하겠습니다. 어머니 아버님께서는 자녀분들을 따듯하게 안아주세요"


아이에게 받은 편지를 꺼내어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어요. 제가 실패하거나 힘들 때 변함없이 응원해 주시고 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을까??


어렸을 적 기억을 되돌려 보면 집 안에선 항상 불안감과 함께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사는 대 가족이었지만 조부모님들은 하루에 몇 번이라도 싸울 것 같은 분위기를 항상 만들고 계셨다. 그래서 그런지 가족들이 다 같이 앉아 식사를 하는 날은 명절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명절엔 꼭 한번 밥상을 엎는 일까지 행사처럼 생겼다. 밥도 따로 먹고 방도 따로 쓰고 남은 작은방에서 엄마 아빠 그리고 형 내가 생활했다. 또 싸우진 않으시는지 전전긍긍하며 말이다.


그런 분위기라 그런지 우리 식구는 가족여행이란 걸 살면서 가본 적이 없었다. 그땐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 여행이라는 것은 아마 사치였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시간이 몇 년 안지나 할머니가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 병원을 자주 오가게 되시고 집에서도 이젠 기운이 없으셔서 그런지 예전만큼 싸우진 못하셨다. 결국 병시중은 엄마의 몫이었다.


할아버지와 가족들의 매번 식사 준비부터 할머니의 병시중, 아버지, 형 그리고 나를 케어하던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몸이 다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아픈 몸으로도 오랫동안 가정을 돌봐주셨다.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점점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 그렇게 고생만 하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뒤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10대 때부터 30살이 될 때까지 20년 동안은 불안감이 당연한 듯이 함께 있었다.

내 어렸을 적 시절이 불행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불안한 집의 분위기에서도 어머니는 한번 힘든 내색 한번 없으셨다. 항상 긍정적이고 유쾌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셨다. 물론 자식들 앞에서 말이다. 어려운 시부모님들을 모시고 사는데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의 여유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그런 환경에서도 얼마나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는지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에 좋은 교육이나 물질적인 풍요는 없었지만 어머니와 웃고 떠들며 행복했던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그런 어머니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불안하고 힘든 환경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기억나 눈물이 난 것일까..


다시 태어나도 나는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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