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업무는 너에게 안 맞는 것 같다. 그냥 다른 일 찾아보렴."
근무했던 회사는 광택과 판금 도색, 덴트 작업을 하는 수리 업체였다. 내 업무는 대부분 광택이었지만 작업이 없는 날이나 중간에 틈이 나면 도색하는 과장님 옆에서 조수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더 쉴 쉬간이 없었다) 도색 보조업무는 페인팅 스프레이 세척과 여러 기초 밑작업이었는데 빼빠질, 탈지. 페인트 도료 준비하기, 건조 작업등이었다.
기술이 필요한 업무는 아니었기에 알려준 매뉴얼대로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었다. 핵심적인 기술을 제외한 부수적인 일들은 쉽지만, 쉬운 게 아니었다. 신너나 페인트, 탈지제 등 모든 것들이 독성물질이라 냄새만 맡아도 금방 머리가 띵해지고 피부에 닿으면 3~4초 뒤엔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독한 물질이었기에 매번 힘든 부분들이 있었다.
그만둘 뻔했던 이유가 있었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는 주변에서의 퇴사 권유였다.
체질이 건성 피부라 원체 약한 것도 있지만 신너를 계속 사용하다 보니 건조해지다 못해 벗겨지고 뒤집어진 것이다.
"야야. 너 얼굴이 왜 이러니. 안 되겠다. 너는 이 일 하면 안 되겠다. 사장님이랑 얘기 좀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과장님이 얘기하셨다.
그냥 지나가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사장님께 심각하게 얘기를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루는 사장님께서 나를 불러다 진지하게 얘기하셨다.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 너 나중에 괜히 잘못되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힘들긴 했다. 하지만 그 이유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20대 남자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건 누구나 똑같다. 당장 피부냐 기술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인데 일단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게 현실적으로 맞았다. 회사가 돈을 잘 벌고 있는 게 막내인 내 눈에도 보일정도인데 그 누구도 그만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도색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돈을 잘 버는 기술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 어떻게든지 도색 기술을 배우고 싶은 욕심이 컸었다.
"사장님 제가 장갑이랑 마스크 잘 끼고 해 볼게요. 다른 분들은 다 괜찮으신 거 보면 제가 애기 피부라 아직 적응이 안 되었나 봐요…. 하하...."
"이놈아. 농담 아니야. 잘 생각해 봐."
"네 제가 정말 힘들면 그때 얘기할게요. 사장님!!"
마음속으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몸이 먼저라는 생각보단 회사에서 안 잘리는 게 우선이였기에 좀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마스크도 잘 쓰고 세척할 때엔 맨 피부에 신나와 페인트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보조업무를 수행하였다. 화장실 가는 중간에도 핸드크림이나 보습이 잘 되는 크림들을 자주 바르고 하면서 적응해 가고 있었다.
회사는 단기간 계속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체인사업을 하였기에 비싼 교육비를 내면서까지 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교육생들도 상주하고 여러 자동차 동호회에서도 소문이 나 손님은 나날이 많아지고 있었다. 자동차 전시회 쪽 활동과 외국으로 기술 특허 수출 사업까지 진행했기에 사장님과 부장님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회사는 지점을 한 군데 더 오픈하였다. 규모도 커지며 자연스럽게 기술자 도 충원 되었다. 파트에 맞춰 팀을 구성해 두 군데 지점으로 나뉘어졌다.
사장님과 부장님은 본점과 지점을 왔다 갔다 하며 업무를 보시고 본점에는 내 위 기존에 있는 기술자분들이 대부분 남으셨다. 그리고 지점으로는 새로 스카우트된 기술자(지점장님) 그리고 나를 포함한 보조역할을 하는 2명이 더 배정되었다.
그 당시엔 알 수 없었다. 내가 억세게 운이 좋았다는 것을.
회사가 새 지점을 확장하기 한참 전부터 나는 기술을 빨리 배우려 노력을 하고 있었다. 모든 업무가 끝난 후 다른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면 늦은 시간에 남아서 도색 기술을 몰래 연습을 할 정도였다. 하루는 남아서 연습하다 바로 위에 연차 직원에게 걸려서 호되게 혼난 날도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벌써 기술자 흉내 내려고 하냐? 넌 아직 그거 하려면 멀었어 이놈아 지금 하는 거나 잘해" 라고 한소리 들었다.
그 일로 안 좋은 소리가 퍼지고 온갖 구박과 간접적 갈굼 등으로 이어지는 힘든 상황까지도 생겨버렸다.
사장님에게도 그 얘기가 전해졌다. 나는 혼날 줄 알고 잔뜩 긴장했었는데 의외로 사장님은 괜찮다며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 주셨다. 대신 말 나오지 않게 잘 정리하고 가야 한다고 하셨다. 그 뒤 다른 직원들에게 걸리지 않게 일단 퇴근했다가 1시간 정도 뒤에 돌아와 연습하고 티 나지 않게 잘 정리해 가며 연습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직원이라도 남아서 본인 실력 향상을 위해 회사 물품을 쓰고 영업하는 시간이 아닌데 불을 켜놓고 작업하고 있는 건 좀 잘못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전기세 수도세 기타 부자재 비용과 혹시 모를 사고라도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 혼자 있는 밤에 사고라도 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정확하진 않지만, 사장님께서 그런 부분을 좋게 봐주셨는지 새로 영입한 기술자분 (업계에서 당시 최고 몸값)을 내 사수로 붙여주시며 지점으로 같이 보내주신 것 같기도 하다.
지점에서 일을 시작한 날부터 매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기존에 계시는 과장님의 실력도 좋았지만, 지점장님의 도색 기술은 두 세수 위였다. 수리하는 차량들의 예상 완료시간보다 단축되는 것은 물론이고 퀄리티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에 가까웠다. 일은 진행이 되면 끊기는 부분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완성되었다.
기술력의 정도를 운전으로 비유하자면 이렇다. 알아주는 총알택시 기사의 운전 솜씨와 전문 카레이서의 운전 솜씨 정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 거기에 더해 지사장님은 자유자재로 드리프트를 하는 수준이었다. 왜 최고의 몸값으로 스카우트 되셨는지 내 눈으로 매일 확인을 하고 있었다.
문제가 돼서 해결해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 수정하는 작업에 있어서 대처 능력은 더 놀라웠다.
옆에서 보조업무를 하던 중이었다.
"야 이놈아. 이제 네가 좀 해봐라. 힘들어 죽겠다."
"네? 제가요?"
"어떻게 하는지 계속 본 거 아니었어?? 지금까지 내가 한 거 잘 봤지?"
"네 그렇긴 한데…. 제가 어떻게 해요. 잘못되면 저 잘려요….""너 인마 열심히 연습했다며 서 사장한테 들었어. 괜찮으니까 해봐 내가 책임질 테니까.
바로 지점장님은 작업을 하라고 장비를 넘겨주셨다. 내가 도색 작업한 것을 고객에게 전달하게 되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고 꿈만 같았다. 기술을 익힌 지 3년 차도 되지 않은 풋내기가 실제 작업 차량을 맡아서 도색을 하는 건 이 업계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스프레이건을 잡으려면 그때 당시 일반 회사 도장부에서는 꼬마부터 시작해 중급자 5년 이상을 거쳐서 최소 7~ 8년 정도는 돼야 스프레이건을 붙잡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당시의 룰이 그랬다.
하지만 연습과 실전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고 부족한 실력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다. 실수로 인해 계속해서 문제만 만들고 있었다.
"야 인마~ 잘 좀 해 인마~"
실수할 때마다 소리치시면서 싫은 소리는 하셨지만 그게 정말 화를 내시는 건 아니었다.
너도 할 수 있으니까 잘 좀 해봐라~ 정도로 얘기하시는 것 같았다.
문제를 만들어도 지점장님께서 계속 뒤를 봐주시며 출고차량에 지장이 없도록 수정을 해주셨다. 공정을 하는 기술도 배웠지만 하자 처리하는 기술을 배운 것이 정말 크나큰 행운이었다. 수정하는 과정을 직접 옆에서 보고 들은 것이 진정한 노하우를 전수받은 것이다.
도색을 입히는 공식은 매뉴얼이 있지만 잘못되었을 때 처리하는 방법은 공식이 없다. 워낙 많은 문제상황이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에 그때 상황에 맞는 처리 방식을 자신만의 노하우로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처리한 것들이 하나씩 쌓여서 진정한 기술자가 되면서 몸값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분의 20년 노하우를 정말 단번에 과외를 받으며 배워버린 격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엄청난 기술자가 될 수는 없다. 습득은 되지 않았지만, 눈으로 계속 보고 직접 들었기에 기술이 빠르게 향상될 수 있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내가 수리할 수 있는 공정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퍼티를 연마하는 작업부터 중도 스프레이 작업 그 뒤 도색 부분을 하는 공정에서도 지사장님이 한 번씩 체크해 주셨기에 좀 더 자신감 있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지점에서 근무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이젠 너 혼자 해도 되겠다."
"네?? "
"내가 안 봐줘도 될 거 같다고~"
"농담하시는 거죠??"
정말일까? 내가 다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얼마나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직은 내가 당장 어디를 가는 건 아닌데, 나 있는 동안 최대한 열심히 해봐"
"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아니 잘해야지 인마~ 최선이 아니고, 손님한테 최선을 다했다고 할래?
"네.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내가 연습했던 것들 그리고 지점장님에게 배운 기술을 이렇게 빨리 써먹을 수 있을지 누가 알았을까? 정말 사람 인생은 모르는 거다.
시간이 지나도 이 사실은 본점에선 전혀 알지 못했었다. 지점에서 하는 작업 차량이 지점장님이 아니라 대부분 내가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입이 근질거렸지만, 말을 아꼈다…. 그러면 지점장님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고 본점에 계신 기술자분들한테도 내가 순번을 새치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점에서 보낸 1년은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준 최고의 시간이라고 확신한다. 어디를 가도 얼마를 주더라도 다시는 이런 배움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지점장님은 최고의 기술 스승님이자 내 인생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감사한 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점장님은 퇴사하셨고 그 뒤로 지점에서 도색업무는 내가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수리를 진행하게 되었다. 물론 실수도 많이 있었다. 문제가 생긴 부분은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마무리 지어놓고 출고에 지장 없도록 했기에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며 기술자로서 인정받던 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너 이거 편지가 왔는데 ~ 영장인 거 같은데." 어머니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영장이라는 단어가 내 머리 깊숙히 뚫고 들어왔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는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아…. 내가 왜 그 사실을 잊고 있었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떻게 말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