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entMeditator Oct 16. 2024

남아 있지만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들

어제 한강의 다큐를 보고 있는데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사람들은 흔히 추억이나 기억을 소중하게 여긴다지만 '자취'나 '흔적'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그보다 쓸쓸하고 우울하게 다가 온다는 것이죠.

  
추억이란 언제든 다시 불러올 수 있는 것이라면 자취는 그저 조용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이죠.




며칠 전, 책장 구석에서 오래된 만년필을 발견했습니다.
어쩌다 저기에 있었는지 모르겠더군요.
한참 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잉크가 완전히 굳어 있었습니다.
손에 들어보니 만년필에 남아 있는 자취들이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도 이 물건을 내가 산 기억은 없습니다.
마치 내 인생에 누군가가 슬며시 남겨둔 자취처럼요.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선물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그 시절엔 나름의 의미가 있었을 텐데 세월이 흐르며 잊혀지고 이제는 누가 건네주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 이 만년필...
한때는 그만큼 소중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나와 함께 남겨져 있는 자취일 뿐입니다.




그 만년필을 들고 있자니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그것들은 언제든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아니라 그저 멈춰버린 채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자취들입니다.
잉크가 굳어버린 이 필기구처럼 과거의 어느 순간들이 남아 있되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들이죠.




추억처럼 나를 웃게 하는 기억은 아니지만 이런 자취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에 두고 다녔는지 잊어버리고 지냈어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되는 물건들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남겨질 자취로 머물게 되겠지요.



이 만년필이 다시 쓰이지 않더라도 그 자취만으로도 내 삶에 충분히 남아 있으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어서오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