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이야기
달콤함에 베여 살갗이 벗겨진다. 아파가는 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그 달콤함을 찾는다.
소리소문 없이 그 달콤함이 사라졌을 때에는 이미 내가 망가진 후였다.
아파가는 것도 모른 채 그 달콤함을 다시 찾는다. 나의 말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올 뿐이다.
그 달콤함이 있었을 때에는 나도 모르는 감정들이,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새어 나왔다. 새어 나온 감정들은 그때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나를 만들고 간 여러 가지의 감정은 재로 남으며 한 곳에 버틴다. 푸석푸석하고 가벼운 재는 바람에 날아가며 남은 재는 땅바닥속에 걸러졌다.
바닥에는 그보다 다양하고 불규칙한 감정들이 몸을 비틀며 서로 엉키게 되어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그 감정을 만들어내 준 그녀를 기다린다.
우연한 계기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 있었구나를 생각했을 정도로 신기했다 또한, 그녀는 무엇보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좋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예뻤다.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배려와 행동, 글자에서도 느껴지는 정성, 그 모든 게 예뻤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고 어려웠다. 나를 위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서 오는 따스함이 나에게 과분하고 좋았다.
그녀가 나의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에는 나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에 따라 울고 웃었다. 그녀가 슬픈 상황에 있으면 슬펐고, 웃는 상황에 있으면 웃었다.
웃음이 새어 나와 나의 표정에까지 넘쳤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고 표정에 새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겉으로 보이기에 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안에서는 정작 자기도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자주 악몽을 꾸었다고 했었고, 혼자 인형을 안고 울었던 적이 많다고 하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채워주는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자신을 챙기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시작하였다. 힘든 일이 있다면 기댈 수 있게.
그렇게 서로가 감정을 내비칠 수 있는 다정한 친구이자, 무슨 일도 도와주고 기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게나 영원할 줄 알았던 빨간 실은 어느샌가 끊겨 바람에 힘없이 날리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녀에게 연락이 없었다. 답장이 와야 하는데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아프거나 사고가 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바빠서 못 봤겠지"라고 생각을 한 채로 발을 동동 그렸다.
이러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채 연락이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과 겹치는 그 시기에 그녀는 잘 살고 있다고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라는 감정과 동시에 정말 이별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너에게 나는 더 이상 좋은 사람인 것 같지 않아 연락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서로 모르게 닮아져 갔던 그녀를 보며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오해했다.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은 빠져나오지 못할 깊은 동굴인 자기 합리화였다.
동굴 밖으로 나오니 내가 그녀에게 했던 모든 행동들이 잘못된 것 같아 그동안 내가 했던 과오에 내가 싫어졌다.
현실을 깨닫고 나니 다시 동굴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싶어졌다.
내가 모르는 채로 내 활기의 빛은 시들어갔다. 그 애가 그 선택을 왜 하고 있는지, 답이 나오지 않을 나에게 되물을 뿐이다.
정해진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메아리가 울릴 뿐, 그 메아리는 나의 마음에 휘몰아친다. 날카롭고 시끄러운 소리들이 나를 괴롭힌다.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오롯이 나 혼자만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겁다. 나는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의 모든 행동이 그녀에겐 상처였을까?"
정말 모든 게 다 착각이었구나, 아무 말 없이 떠난 너는. 네가 그런 선택을 한 만큼 내가 그만큼 잘못했다는 것이겠지.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처럼 느낀다. 아무리 내가 혼자서 발악해도 상황을 바뀌어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나를 악화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자연스럽기에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 한순간에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된다는 것에 너무 무서웠다.
시간이 지나면 이별에 대해 무뎌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진 상처는 부식되어 버린다.
연락을 기다리지만, 연락을 기다리지 않는다. 너를 위한 연락은 기다리지만, 나를 위한 연락은 기다리지 않는다.
나의 수백 가지 생각과 감정이 너에겐 그저 단편영화의 엔딩으로 이해하는 것일까?
내가 너를 우연히 만났을 때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우리가 함께 지낸 나날들을 한 편의 추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난 지금, 너를 생각해 보니 행복의 찰나의 순간을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너는 나에게 고마운 사람인데, 너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나와 함께 있는 미래를 바라보며 네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과거는 무엇이었을까.
미래를 그리던 우린, 과거에 머무른 채 서로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구나
그녀를 기다린 지, 올해의 다른 계절을 만나보았다.
여전히 악몽을 꾸는지, 다치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자존감이 낮아 마음 약해질 일이 많은지,
여전히 혼자서 인형을 안고 울고 있는지, 너를 만나면서 응원해 주던, 격려해 주던 너에게 했던 모든 말들은 도움이 되었는지.
나를 만나서 행복했었는지. 나와 헤어지고도 행복한지.
연락은 닿지 않지만 난 네가 행복하길 빌어.
잘 지내? 너의 스물다섯은 어떤지
보이지 않는 모든 발자국은 너에게로 향해있더라
따스한 햇빛이 너의 눈물을 닦아주기를.
선선한 바람이 너의 앞날을 밝혀주기를.
그동안 고마웠어. 행복하길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