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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오선지

by 새긴이 Feb 06. 2025


오늘도 집에서 오선지에 선홍빛과 진한 빨간색들로 계이름을 만든다. 준비물은 연필과 펜이 아니라 잉크의 뚜껑을 열 수 있는 날카로운 물체면 아무거나 된다고 생각한다.

잉크를 쓰고 싶으면 겉에 있는 껍질을 벗겨내야 잉크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잉크의 뚜껑을 열어도 알아야 될 점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사방팔방 터져서 잉크의 길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내가 보기엔 잉크도 살고 싶은 욕구가 있는 듯하다.


빨간 잉크를 쓰고 바로 굳지 않는 것처럼 나의 상처도 아물지 않았다. 구멍이 나버린 곳에는 계속 의미 없이 잉크만 조금씩 흘러내릴 뿐이다.

이 잉크는 내가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지만, 그만 쓰고 싶을 때에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한다. 나도 멈추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때론 규칙적으로, 때때론 불규칙적으로 박자가 만들어지는 그 공간에 나의 자유의지 따위는 없다.  그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조심스럽게, 아니면 난폭하게 하고 싶은 대로 시작은 할 수 있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그 지휘자는 음악에 사로잡혀 먹힌다. 지휘자는 그 빨간색으로 물든 비극적인 악보 속에 연주를 멈추려 안간힘을 내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검붉은 연주 속에 휩쓸려가고 있던 나는 눈을 감았다.


팔목에 베인 빨간 잉크가 멈추지 않고 나를 흥건하게 만들며 뒤이어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친다. 나는 그 파도 위에서 살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 친다.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려고 움직이면 그 파도는 나의 마음에 이해하지 못하는 듯 나를 옥죄어온다. 내가 걸지도 않은 쇠사슬이, 내가 끼지도 않은 수갑이 점차 나에게 껴지며 나를 잠식해 온다.

그 빨간 파도 안에서는 일어나는 일들은 오로지 나만 알고 있다. 뭉특한 쇠들이 나를 붙잡으며, 날카로운 무수한 칼날비들이 내 살을 갉아먹는다. 갉아먹힌 살들과 피들은 물방울이 되어 수면 위로 올라간다. 그 파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뿐,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목청이 터지며 소리를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한 것 같다. 아무도 없어 보이는 어두운 물방울 속에 나는 그저 작은 기포가 되어있을 뿐이다.

표면 위에 기포가 점점 사라져 고요한 바다가 되어 갈 때 즈음에 밝은 불빛이 나를 불친절하게 깨우듯 강하게 쐬어진다.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나를 잡아두고 있었던, 내 팔에 묶여 있었던 쇠사슬은 나에게 생명줄을 연장해 줄 액체로 변해있었고, 나에게 감겨 있었던 쇠사슬은 내 주변에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꺼내진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나의 지휘실력에 평가를 해주고 있었다. 종이와 펜으로 여러 가지 체크를 하는 시늉과 짧지 않은 글을 쓰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서로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아까 있던 파도가 내 눈을 가린 것일까 볼 필요 없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뒤 소리 너머로 들리는 것들은 건장한 남자 몇 마디와 울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지휘가 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나 보다.

나의 팔은 지휘를 하느라 잦은 피멍과 상처투성이였다. 나는 이 일들을 언제 멈출지 모르겠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살고 있다.

나는 오늘도 파도의 작곡과 지휘를 준비하려 눈을 감을 것이다.


오늘도 집에서 오선지에 선홍빛과 진한 빨간색들로 계이름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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