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를 조금 남겨두고 있는
정확히 4시 43분
퇴근 후 아지트에 와서 10분 발성까지 마친
후니까 잠시 내 시간을 가져도 될 것이다.
오전 7시 20분쯤에 출근주차를 마치고
근무지를 향해 걸어간다.
아침마다 동그라미에서 작아지고 있는
흰 달을 본다
처음엔 보름달에 가까웠다.
불과 삼 일 전인데 말이다.
달은 차오르는 게 자연스러운데
아침달은 점차로 제살을 덜어 내고 있다.
존재만을 남기고 싶어 한다.
창백한 소녀 같은 모습을 봤을 때부터 불안했다.
한낮은 어영부영 지나가 버리고
오후의 하늘은 어제처럼 온통 회백색을
띄며
갯벌을 펼쳐 놓은 듯한 구름등고선이다.
흰색 몽글몽글한 갯벌은 이내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늦가을 저녁은 생각보다 길을 서둘러 온다
퇴근길 하늘
마음속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스산함은
젊은 날 회오리는 아니지만
자기 공간인 양 빈집을 차지하고 싶어 한다.
비지 않았다고 충만함으로 금세 채워갈 거라고
허공에서 소리 없이 외쳐보지만
분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빈자리를 내어준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일상을 견디며 잘 지내고 있지만
이 계절 이 시간이 주는 스산함과 허무함을 잠시
허락하고 싶다.
살아감이 아등바등 이 든, 가볍게 터치하고
넉넉히 이겨냄이든
무엇을 위함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들을 쓱 던져 보게 된다.
살아 버린 세월들
살아야 할 세월들
그리고 지금
너는 어디로 가고 있냐고
나는 숨을 쉰다
그리고
글을 쓴다
세상의 소리들과
모든 미세한 것까지 가만히 내려앉을 시간들이
다가온다.
잠시 왁자지껄한 요란함이 있겠지만
이내 고요한 허무가
이맘때쯤 항상 찾아왔다.
이 시간만이 유일한 빈틈인 것처럼
어디로 갈까
가던 길을 부인할 수 없고
돌아 설 수 없다.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가야 한다.
영혼의 깊은 밤을 걸어야 한다
살아 숨 쉬는 동안
방황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온전한 만족은 없었다.
지금 이시간
허무함 하나 허락하여 심어 가고 있다.
진지함은 양념이다.
전화가 울린다.
이곳 아지트에서 핸드폰으로 글을 쓰는
내게 전화한 둘째
허무를 너는 알까?
아무것도 아닌 나를
그리고 너를
어둠이 내리고 있다.
지하철 한 코스 더 가서 내린 둘째가 오고 있다.
허무에서 나를 꺼내준 그녀를 보러 가야 한다
허무에서 꺼내준 건지
일상으로 초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허무보다 중요한 허기짐을 함께
해결해야 한다
그녀도 나도 퇴근길이다
사색은 저녁으로 일단 밥 말아먹어야겠다.
혼자 갖게 된 시간 행복했어라.
빈공간을 채우던 스산함은 시장함으로 물갈이됐고
허무는 또 다른 허무를 향해 가고 있으니
함께에 묻혀버린다.
늦가을! 언제나 처럼 내게로 오는 것이 쉽지 않을 테다.
만만한 흰달빛 소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