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에 죽을만큼 불안하고 화가 나요
살면서 자신의 생각, 감정에 몰두해 본 적 있는가? 우울, 절망, 자기혐오에 심취하기는 쉽지만 일상 속 소소한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는 흔치 않다. 홍조 극복 훈련의 일환으로 셀프토크를 시작하고 나서 스스로를 관찰하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얼굴이 빨개질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갖는지, 그런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예전 같으면 휙 지나갔을 순간들을 붙잡아두고 살피다 보니 의외인 면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가 당황스럽거나 불안하거나 긴장할 때만 얼굴이 빨개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외의 감정을 느낄 때도 얼굴이 훅훅, 그것도 정도가 심하게 빨개지곤 했다. 바로 화가 날 때, 짜증 날 때, 억울할 때였다. 당황, 불안을 느낄 때는 어떻게 셀프토크를 해야 하는지 상담사 선생님께서 템플릿을 만들어주셔서 그대로 적용할 수 있었지만 다른 감정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바로 그다음 주 상담 때 선생님께 방법을 여쭤봤다. 선생님께서는 감정이 바뀌어도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서 셀프토크를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번에도 이전 장처럼 예시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상황에 대한 생각 인지하기
상황 : 상사가 전에 지시한 걸 까먹고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냐고 함. 전에 지시하신 일이라고 했더니 기억 안 난다고 함.
상황에 대한 내 생각 : ‘아니 본인이 시켜놓고 왜 저러지? 기억 안 난다고 하면 단가? 메신저로 기록해 놓을 걸. 구두로 전달받은 거라 증거도 없고 빡치네?’
생각 받아들이기
충분히 짜증 나고 빡칠만한 일이라고 감정 인정해 주기.
이 생각이 왜 드는지 궁금해 하기
나는 지금 왜 화가 날까?
홍조에 대한 관점 전환하기
내가 비난받았기 때문에 나를 보호하기 위한 주장, 행동을 하라고 얼굴을 빨갛게 만들어 신호를 주는 것.
몸이 이완할 때까지 기다리기
얼굴이 또 빨개졌다고 질타하지 말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얼굴이 빨개진 것을 받아들이며 진정되기를 기다리기.
불안 템플릿을 변형하는 데 애를 먹었던 건 이 ‘홍조에 대한 관점 전환하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당황, 불안할 때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치고, 화날 때는 왜 얼굴이 빨개지는 거지? 상담사 선생님은 분노로 인한 홍조 또한 1차적으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올라오는 거라고 하셨다. 화나고, 짜증 나고, 억울한 감정이 드는 건 내가 비난받고, 공격당했기 때문이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공격에 맞서라고 몸에서 신호를 주는 거라고 했다.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에너지가 확 올라와줘야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어 얼굴에 혈액을 공급해 주는 거라고.
애초에 내가 공격당했을 때 잘 주장하고 행동해서 스스로를 성공적으로 보호한다면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될 필요도 없다. 물론 비난받고 공격받는 상황에 처하면 당황스럽고 머리가 백지화돼서 아무 말도 못 할 확률이 높지만 나중에라도 같은 상황이 왔을 때 주장할 수 있도록 미리 대책을 세워놓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한다. (물론 주장을 못할만한 상황도 있고, 주장을 했다고 꼭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 원리는 이렇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예시는 나뿐만 아니라 K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빡칠만 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소의 나는 이것보다 훨씬 사소한 문제에 지나치게 분노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냥 넘어갔을 문제들에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났고 소리를 빽 지르거나 물건을 다 집어던지거나 불을 질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셀프토크를 하기 위해서는 화나고 짜증 나는 감정을 인정하고 어루만져줘야 하는데 나는 내가 너무 별거 아닌 거에 짜증이 잘 난다고 생각했다.
셀프토크를 하다 보면 ‘화가 났구나. 그럴 만 해. 누구라도 짜증 났을 거야.’하고 내 감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내가 너무 속이 좁고 예민해서 별거 아닌 거에도 짜증 나는 건가?
라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억지로 셀프토크를 해도 마음속에서는 화내고 짜증 내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분노에 관해 수박 겉핥기식 셀프토크를 하던 나는 결국 상담사 선생님께 SOS를 쳤다.
“화나고 짜증 날 때 알려주신 대로 셀프토크를 해봤는데요,
자꾸 제가 너무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화를 내는 거 같아요.
다른 사람이라면 안 이럴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별거 아닌 거에 짜증 나고 화나는 저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지금 ‘다른 사람이라면 안 이럴 텐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홍시 님은 스스로가 그런 상황에서 조금 더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말씀하신 걸 들어보면 이상적인 나와 실재적인 나 사이에 괴리가 있는 거 같아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마음속 깊은 곳에 처박혀 있던 무언가가 꺼내진 느낌이 들었다. 맞다. 나는 늘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내가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현실의 내가 이상적인 나를 따라가지 못하자 급격하게 우울해졌고 무기력해졌다. 그런데 이게 분노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지금 실재적인 나는 현재 상태가 불만족스럽고 욕구가 좌절된 걸로 보이거든요.
별거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에도 자꾸 짜증이 나는 건 그만큼 본인의 어떤 경계(본인의 선)가 계속 침범당해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나를 보호하라고요.
그래서 자꾸 분노, 짜증 같은 감정으로 신호를 보내는데 지금 이성은 계속 그걸 무시하라고 하고 있잖아요.
‘지금 화날만한 상황이 아닌데 네가 예민해서 그런 거야. 네가 이상해서 그런 거야.’라고요.
이게 해소가 되지 않고 억압만 받으니까 감정은 점점 더 쌓여서 작은 것에도 훨씬 더 크게 분노하게 되는 거죠.
비단 분노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고 불안도 똑같아요.
이상적인 나는 당황이나 긴장도 잘 안 하고 프로페셔널한 사람인데 실재적인 나는 불안을 잘 느끼죠.
근데 이걸 ‘당황하면 안 돼. 얼굴 빨개지지 마.’ 하고 억압하니까 억압된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별거 아닌 것에도 크게 불안해하는 걸 수 있어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불안, 우울, 분노, 짜증 같은 감정들을 무시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런 감정이 나타나려고 하면 ‘이건 내가 나약해서 그런 거야. 그냥 아예 생각을 하지 마. 모른 척해.’하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여태껏 이 방법이 살아오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구황작물처럼 감정의 뿌리만 토실토실하게 키우고 있는 꼴이었다니. 과거의 업보빔을 이렇게 맞는구나 싶으면서도 해결책에 조금 더 가까워진 거 같아 약간의 안도감도 들었다. 선생님은 이어서 내가 거듭 말한 ‘별거 아닌’, ‘사소한’이라는 단어에 집중하셨다.
“지금 당장은 별거 아니고 사소한 문제에 분노하는 내가 이해 안 될 수도 있지만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면 좋아요.
이상적인 내가 생각하기엔 너무 별거 아니고 사소한 걸로 화가 나고 불안해요.
하지만 우리는 별거 아니고 사소한 일에 분노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아요.
내가 지금 의식은 못하고 있지만 분명 과거의 경험 때문에 어떤 부분이 건드려지고 있는 거거든요.
다른 사람이라면 같은 상황에서 화가 안 날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어떤 경험, 문제가
건드려진 거기 때문에 불같이 화가 나는 거예요.”
‘우리는 절대 사소한 거에 화나지 않아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고 인상 깊은 문장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속 좁고 예민해서 별거 아닌 거에도 욱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니. 선생님의 말씀 덕에 자기혐오 용량이 몇 스푼은 덜어진 느낌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고,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살펴봐야 해요.
그럼 분명 좌절된 욕구가 드러날 텐데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연습을 해줘야 해요.
그 욕구가 충족되면 같은 상황에서도 전만큼 화가 안 날 거예요.
하지만 전처럼 좌절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고 무시만 한다면
감정과 욕구는 해소되지 않고 계속 쌓여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겠죠.”
선생님을 통해 ‘내가 화날만해서 화난 거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니 셀프토크 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불안할 때처럼 똑같이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살펴보고 헤아리는 게 가능해졌다. 아직 서툴긴 하지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하며 좌절된 욕구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욕구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채워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가 평생을 이 과정 없이 살아왔어서 감정이 널을 뛰었던 걸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속 빈 강정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걸까? 1만큼의 자극에도 10만큼 반응하는 나를 고치기 위해서 셀프토크를 열심히 해보기로 했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갖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좌절된 욕구를 세심히 챙겨주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1만큼의 자극에 1만큼만 화낼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