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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토크의 고충

내 마음대로 심장을 멈출 수 없듯이

by 홍시

살면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우후죽순으로 생각을 떠올리거나 스스로를 질타하고 타박한 적은 있어도 ‘말’이라는 것 자체를 걸어본 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양말이 어딨나~♪” 같은 시답잖은 혼잣말만 해본 게 다인데 돌연 셀프토크를 해야 하다니. 그것도 눈앞에 사람이 있고 얼굴이 빨개진 상황 속에서 말이다. 삐용삐용 얼굴이 빨개졌다는 경보가 울리고 나면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에 대한 내 생각, 감정을 인지하고, 왜 그 생각과 감정이 드는지 헤아려주고, 인정해 주고, 어떤 욕구가 좌절되었는지,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이 긴 일련의 프로세스를 소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담사 선생님께서 셀프토크를 꼭 그 자리에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셔서 초반에는 퇴근길에 핸드폰으로 글을 쓰며 셀프토크를 했었다. 퇴근길마다 그 상황을 복기하다 보니 얼굴이 붉어질 때의 내 상황을 조금 더 면밀히 곱씹을 수 있었는데 새로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은 내가 늘 10점 만점 중 10점 정도로 빨개진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평균적으로는 5점 미만으로 붉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항상 긴장을 심하게 하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2~3점 수준의 홍조만 헤아리며 지내던 내게 돌연 5점 이상의 쓰나미 같은 홍조가 몰려온 날이 있었다. 이날의 홍조는 10점 경보를 울리며 평소와 달리 빠르게 가라앉지도 않아서 나를 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눈앞에 다른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서 있는데 그렇다고 내게 말을 걸지도 않고, 자리를 빨리 피할 기색도 없어 보여서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색하게 시선을 탱탱볼 마냥 이곳저곳으로 튕기며 서있었다. 눈앞에 다수가 있던 적은 거의 없었기에 패닉에 가까운 당황에 빠진 나는 순간 셀프토크의 ‘셀’ 자도 떠올릴 수 없었다. 심하게 낙담한 나는 상담사 선생님께 바로 그때를 회고했다. 이놈의 자율신경계는 정녕 제 마음대로 컨트롤이 안 되는 걸까요?


“아쉽게도 자율신경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럼 심장 뛰는 것도 내 마음대로 멈출 수 있어야 하는데요?”


그건 안 되지. 선생님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듯 나를 격려해 주셨다.


“그래도 지금처럼 훈련을 하다 보면 홍조의 빈도나 정도가 점점 우하향할 거예요.

완전히 얼굴이 안 빨개진다, 이런 건 불가능해요.

대신 내 주의를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면

홍조의 강도나 지속시간도 분명 줄어들 거예요.

또 훈련 중에 얼굴이 빨개지면 내 자율신경계를 그냥 자유롭게 허락해 주자, 하고 셀프토크를 하는 거예요.

내가 상대를 위험한 적이라고 판단하지 않아도 자율신경계는 상대가 내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빨갛게 만들고 식은땀도 나게 하고, 하는 거거든요.

이럴 때는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얼굴을 빨갛게 안 만들어도 돼.’ 하고

자율신경계가 신경전달 물질을 분비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셀프토크를 하면 돼요.”


결국은 훈련과 기다림이 답이라는 소리였다. 역시 드라마틱하게 내가 자율신경계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 알면서도 재차 낙담한 나는 그럼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셀프토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여쭈어봤다. 현재의 나는 사람들과 대면할 때 심하게 당황해서 대화가 다 끝나고 혼자 있을 때 복기하듯 셀프토크를 하는데 그 상황에서 바로 주의를 환기시켜 얼굴이 조금이라도 덜 빨개질 수 있는 치트키가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의 나는 사람이 앞에 있을 때 셀프토크가 바로 발동되지는 않아서 대신 1) 내가 하고 있는 행동에 과하게 집중하거나(밥 먹기, 키보드 두드리기, 물 마시기 등) 2) 특정 사물을 골똘히 집중해서 보는 등으로 내 얼굴이 붉어지는 데서 주의를 분산시킨 후, 상황이 다 끝나면 셀프토크를 진행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습도 나쁘지는 않은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 셀프토크를 할 때 ‘내가 이 연습을 반드시 잘 해내야 해!’라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긴장 수준을 올릴 수도 있어서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씀도 함께해 주셨다. 현재 나는 사람을 대면할 때 사람들이 내 얼굴을 평가한다는 생각을 자동적으로 하는 상태라서 사람과 대면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하거나 의식을 다른 데로 두는 등의 방법으로 주의를 분산하면 좋다고 했다. 내 주의는 자유롭고, 내 주의는 홍조에만 집중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주의를 분산시킬 때는 뇌를 사용하는 일보다 몸을 움직이거나 어떤 콘텐츠에 대해 생각을 하는 편이 좋다고 한다. 아마도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는 뇌가 잘 안 돌아가기 때문에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몸이나 눈앞의 대화거리에 집중하는 게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몸을 움직이거나 어떤 콘텐츠에 대해 생각을 하려고 하면 주의가 자연히 따라가므로 내 얼굴, 내 홍조에서 주의가 멀어질 수 있다. 게다가 늘 대화에 집중 못하던 내가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는 것이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누가 말을 걸 때 그 자리에서 셀프토크를 하는 것보다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차분히 하려고 노력한 후에 내게 던져진 대화 주제에 대해 차근차근 생각해 보고 나도 답변을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홍조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화의 초입에는 80% 이상의 확률로 얼굴이 붉어지긴 하지만,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대화 콘텐츠에 집중을 하다 보면 어느새 얼굴의 붉은기가 가라앉아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셀프토크는 퇴근길에 휴대폰 메모장에 정리해 보았다.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생각, 감정이 들었는지, 왜 그런 감정이 들었고, 충분히 그런 감정이 들만했다고 다독여줬다.


나는 상담을 시작한 날부터 이 과정을 매일 반복하고 있다. 이제 6개월 정도 된 것 같은데, 솔직히 얼굴이 덜 빨개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매번 10점 만점 중 10점보다는 5점 미만으로 얼굴이 빨개질 때가 더 많고, 얼굴이 빨개졌다고 해서 예전만큼 죽고 싶을 만큼 좌절스러운 기분이 들지도 않고, 얼굴이 붉어진 것을 잠깐 참고 대화를 하려고 노력해 보면 또 어찌어찌 대화가 이어 나가지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얼굴이 빨개졌다고 해서 스스로를 못났다고 질책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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