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환상 속의 그대
의자가 나에게 말을 한다!
사물이 사람한테 말을 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신 차려라, 오하루! 아까 의자 들고 올 때 머리를 다친 그 후유증일 거야. 일시적인 거라고. 잠깐의 뇌진탕 같은 거란 말야. 그러니까 정신 차려, 오하루!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려고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의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계속 말을 했다.
“아니, 어떻게,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사람이랑 말을 할 수 있다니! 오오오!”
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오하루!
이거 그냥 판타지야! 헛된 꿈이라고. 판타지는 이 지하실의 망명정부 하나로 충분해. 나 혼자만의 환상 속에서 시인 흉내까지야 괜찮지만 미치광이가 될 수는 없어! 미쳐도 곱게 미쳐야 돼. 이건 아니야!
이 순간 퍼뜩 어머니가 떠올랐다. 귀신과 싸우다 끝내 이기지 못했던 어머니!
10여 년 전 어머니는 소위 약장수들이 약을 파는 장소에 동네 어른들과 함께 갔던 모양이었다. 그날따라 운이 좋았던지 어머니는 제법 큰 TV 한 대를 경품으로 받아왔다. 아들아! 내게도 이런 행운이 왔단다! 하는 의기양양함이 어머니 얼굴에 잔뜩 묻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조금씩 앓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당신이 아픈 이유가 그 TV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력도 없는 양반이 밤사이에 괴력을 발휘해 그걸 밖에 내다버렸다. 부정 탄 물건이라고, 귀신 붙었다고, 그래서 자신이 아픈 거라고. 그러나 나는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의 병세보다는 다른 게 더 궁금했다.
‘어떻게 어머니 혼자서 그 무거운 TV를 버릴 수 있었지?’
얼마 후 어머니는 병원에서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돌아가셨다. TV를 받은 지 꼭 석 달 만이었다.
저 의자도, 어머니의 TV처럼, 부정 탄 것일까? 귀신 붙은 것일까? 나도 어머니처럼 큰 병에 걸린 것일까? 지금, 어떻게, 무얼 해야 하지?
“저에게 말을 좀 해 볼 수 있어요? 제발요. 말 좀 해봐 줄래요? ‘우리’가 정말...... 아, 어서요!”
의자의 목소리는 초조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이 잔뜩 묻어있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소리, 소리가 아니라 몸을 보여줘요. 지금 환청을 듣는 게 아니라는 걸...... 모습을 보여줘 봐요.”
나는 내가 한 말의 결말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눈앞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느 미친 새벽의 해프닝으로 묻어두면 된다. 그런데 만약 뭔가 실체가 등장한다면 앞으로 계속 미친 채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 미친 운명의 순간이었다. 손에 땀이 흥건했고 머리는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온 몸의 땀으로 옷이 젖을 지경이었다.
1초, 2초...... 1분......
의자로부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이대로 끝인가 싶었다.
쿵쾅거리던 심장도 이제는 차분해졌다.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봤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익숙한 것들 속에 새로운 것이라곤 오직 의자 하나뿐. 의자는 자신이 지하실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입생임을 과시하듯 빨간 색을 진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생긴 것은 역시나 멋있었지만, 하는 짓은 몹시도 얄미웠다.
그래! 새벽에 갖고 온 저 의자. 말하는 의자! 귀신 붙은 의자!
아니 이제는 과거형으로 말해야지. 말했던 것 같았던 의자였다!
가만히 의자를 노려봤다. 의자는 나의 말 이후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열기가 느껴졌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싶었다. 다시 의자를 쳐다봤다. 여전히 말이 없다.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흘러간다.
젠장! 뭔가에 단단히 홀렸었네. 이제 이렇게 새벽에 물건을 집어오는 것도 그만둬야 하는 건가? 지하실로 망명을 결정하고 지난 1년 동안 마치 독립운동처럼 해왔던 나만의 의식 같은 이 일도 이제 끝인가.
마음 한 편이 씁쓸했다.
남이 버린 것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다니! 도대체 이 세상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과연 뭘까? 그런 게 있기나 할까?
빨간 의자를 피해 다른 의자에 걸터앉았다.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사실 지하실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담배 한 대가 몹시도 간절했다. 후우욱 하고 연기를 내뿜으니 마음이 한층 더 편해졌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또 불편했다. 아내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내는 담배 피우는 나를 그렇게 싫어한다. 끊어라, 줄여라, 길에서 피우지 마라, 여기서 피우지 마라, 저기서 피우지 마라, 어떻게 그렇게 1년 365일 줄기차게 타박을 할 수 있을까. 급기야 지난번에는 담배를 피우면서 밀크 커피를 마시는 내게, 아가리 똥내를 아느냐고 했다. 갈수록 입이 험해진다.
대개의 경우 아내의 싫은 소리에 나는 순종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게 몇 있다. 축구와 담배 뭐 그런 것들이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공격하면 나는 반항한다. 반항이라고 뭐 거창할 게 없다. 죽는 시늉을 하면서 기신기신 버티는 것일 뿐이었다. 몰래하고, 적당히 감추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내라는 독재자와 사는 아주 리얼한 나의 모습이었다. 이 지독한 긴장의 순간에도 여지없이 아내는 어김없이 등장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참으로 ‘위대한 독재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몸을 틀어 의자를 다시 쳐다봤다. 한결 느긋해졌다. 상상이 발동했다. 나는 <아라비안나이트>의 한 토막을 떠올렸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 램프를 문지르면 마법사가 나타나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 혹은 동화 같은 이야기! 혹시 저 의자가 마법 의자일 수도 있었을까?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느닷없이 의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의자 씨!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들을 준비 됐으니까.”
스스로가 놀랐다. 어디서, 왜 갑자기 이런 호기가 생겼지?
잠시 침묵.
정말 또 대답하면 어떡하지? 마음속 한편의 그런 조바심과 두려움과는 달리 내 입에서는 마치 방언이 풀리듯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의자 씨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앉아 씨? 네다리 씨?”
몇 개의 이름을 농담처럼 더 나열하려는 순간, 의자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제게도 그런 이름이 가능한가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처음이라서요!”
막상 의자로부터 말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목덜미가 다시금 서늘해졌다. 하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까와는 달리 공포와 두려움 한편으로, 마법 의자라는 음흉한 ‘희망’ 같은 게 생겼다. 그 희망이 똥인지 된장인지는 찍어 먹어봐야 안다!
약하면 지는 거다. 절대로 만만하게 보이면 안 돼!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기선을 잡았어! 조금 더 세게!
“내가 톱이나 망치를 들고 앉아 씨에게 달려들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걸요. 아니면 다시 내다버릴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여러 가지라는 걸 잊지 말아요.”
앉아 씨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사실은 저도 당신처럼 너무 놀랐었어요.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내 말을 알아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한 50년? 그런데 좀 이상하게 생긴, 아 미안해요. 나쁜 뜻은 아니에요. 어쨌든 당신이 제 말을 듣고 반응하니, 제 이 딱딱한 몸이 휘기라도 할 듯이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나, 사람과 이야기 할 수 있다니!”
앉아 씨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말투는 세련됐다. 약간 하이 톤이기는 했지만, 거슬릴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이런 스타일이라면 해코지할 귀신같지는 않은데. 그럼 정말 마법에 가까운 것일까? 마음이 분주해졌다. 하지만 급할수록 천천히!
“이런 경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거예요. 귀신들렸다고. 의자에도, 사람에도, 귀신 붙었다고! 의자에 귀신이 붙어서 사람에게 말을 걸고, 귀신 들린 사람이 의자가 하는 말을 알아 듣고. 앉아 씨!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 거죠? 말 좀 해봐요!”
앉아 씨는 잠깐 침묵했다. 말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심 초조했지만, 느긋하게 기다리는 척 해야만 했다. 이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꿈꾸는 희망의 판타지와 동화스러운 해피엔딩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