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 환장 vs 환상
“사실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1초나 쉬었을까? 앉아 씨는 다급하고도 격정적으로 말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요! 복수해줘요!”
나는 놀라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황당했다. 그리고 정말 너무 실망했다.
램프의 요정은 온데간데없고, 아니 그 그림자조차 없고, 이 무슨 ‘전설의 고향’ 처녀귀신 스토리인가! 새로 부임한 마을 사또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는 처녀 귀신의 현대판 스토리? 하루하루가 최첨단이고, 상상력이 기술에게 날마다 KO패 당하는 이 휘황찬란한 시대에, 조선시대 복수극이라니! 게다가 그 주인공이 되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말문이 막혔다.
앉아 씨는 자신의 말이 지나치게 직선적이었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말을 보탰다.
“당신이 제 말을 알아듣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다시 당신과 같은 사람을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건 확실해요. 그래서 황당하고 무례하다고 느끼시겠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부탁이에요.”
내가 의자 귀신과 대화하면서 이 귀신에게서 램프 속의 요정을 꿈꾼 것은 사실이다. 처녀귀신이냐 요정이냐,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요정을 선택하겠지만, 뭐가 됐든 이건 아니었다. 의자 귀신의 한을 풀어준 현대판 의인 같은 것은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명확한 생활신조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조용하게, 무사하게 하루하루!’
“지금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어요!”
앉아 씨의 말은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었다.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을 그때, 아니 뭐라고 답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그때 보일러가 ‘위이잉’하고 요란스레 작동했다. 아내가 잠자리에서 깨어나 씻으려고 욕실의 수도를 튼 게 분명했다. 보일러 모터 소리는 마치 하늘 높은 곳에서 구세주가 강림하는 소리 같았다. 지하실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의자와 나 사이의 침묵이 그 소리로 깨졌다.
“이 소리는 아내가 깨서 내는 소리이고, 지금 7시가 됐다는 걸 뜻해요. 이제부터는 서둘러야 해요. 나는 장작을 나르고, 남은 설거지를 하고, 빵을 만들고, 아내는 아침을 준비하고, 그 다음에는 가게 오픈 준비를 부지런히 해야만 11시에 맞춰 장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죠.”
나는 앉아 씨를 바라봤다. 물론 의자 위 텅 빈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당신의 사연은 있다가, 오후 2시 이후에나 들을 수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나는 일어서면서 다시 한 번 의자 위 텅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궁금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편히 쉬고 계세요!”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 어쩔 수 없었다. 손님에게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듯 앉아 씨에게 말했다. 의례적인 공손함이 가득한 매끈매끈한 어투, 한마디로 영혼 없는 멘트. 나는 앉아 씨에게 “미안하다” “기다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도저히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숨은 뜻을 앉아 씨는 알아차렸을까?
허리를 수그려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위로 올라왔다. 등 뒤로 앉아 씨의 소리가 들렸다.
“겁쟁이! 비겁한 자식!”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없지만,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정만큼은 사실이었다.
“사람 만났네, 하고 잔뜩 기대했는데, 생긴 건 꼭 메뚜기처럼 생겨가지고! 젠장.”
인간의 예의는 모르는 의자 같았다.
물론 나의 속마음 또한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캐릭터가 아니다. 복수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에너지를 바치는 사람이 아니다. 확실히 말해두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나는 내 한 목숨 부지하기도 버거운 사람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현실을 견딜 아주 약간의 판타지였다. 이 각박한 현실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기적이 필요한 사람이다.
젠장! 요정이 아니라 귀신이네, 귀신! 지금 누가 누구에게 사정해야 하는데!
계단을 빠져나와 문을 닫아야 할 차례다. 날씨마저 꾸물꾸물해서 혹시 비가 올 걸 대비해 문을 닫아놔야 했지만, 대충 철망으로만 막아놓았다. 고양이가 너무 많이 드나들어 배관을 다 갉아 놓는 바람에 얼마 전부터 철망을 쳐두고 있었다.
혹시 모르지. 철망 틈 사이로 귀신이 빠져나갈지!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사물들의 정령은 자신의 본체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런 점에서는 동물성이라기보다는 식물성이었다.
이제 이 일을 어쩐다? 어쨌든 아내에게는 의자를 집어왔다는 것부터 그 의자가 말을 한다는 사실까지 아예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내가 알면 그 후폭풍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내의 목소리에 귓전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 왜 쓸데없이 그런 것들을 갖고 와서는 일을 만들어?
- 앞으로는 절대 금지야! 다음에 또 뭐든 집어오면 아예 너를 갖다버린다!
- 동사무소에 폐기물 신고 했으니까 당장 갖다놔!
아니면 조금 걱정하게 말할지도 모른다.
- 정신 차려, 오하루! 나랑 병원에 가자. 가서 정신과 상담을 좀 받아보자!
하지만 아내가 지하실에 갈 일은 아예 없으니까,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내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삽시간에 외로움이 몰려왔다. 현실이 더 무거워졌다.
하지만 아내를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아내는 역시 아내였다. 같이 가게 오픈 준비를 하는데, 뭔가 이상했던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말했다.
“너, 무슨 일 벌였지? 그치?”
“아닌데! 아무 일도 없는데?!”
일단 발뺌을 했지만 아내의 촉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여차여차해서 의자를 주워왔다고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말하는 내내 심박수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어디 한 번 봐?”
“에이, 지금 바쁜데 나중에 한가한 때 봐!”
그렇게 퉁 치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서있는 아내의 옆에서 지하실 입구의 철망을 걷으려니 정말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만약 의자 귀신이 아내에게까지 말을 걸면 어쩌지? 만약 아내가 놀라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또 어쩌지? 지금 다 털어놔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 계단 끝에 놓인 의자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주워 왔어? 웬일이야, 이렇게 예쁜 걸?”
의외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직 지하실 안에 놓여있는 의자, 그 귀신 붙은 의자, 아니 말하는 의자, 내가 이름을 지어준 그 의자 ‘앉아 씨’를 아직 보기 전이었다.
“괜찮지? 잘 어울리지? 나도 이제 아무거나 주워오는 게 아니라고!”
초조함을 애써 감추며 호들갑스럽게 내가 말했다.
“됐지? 이제 올라가! 빨리 오픈 준비해야지.”
“두 개 갖고 왔다며? 하나는 또 어디 있어?”
아내는 그 말과 함께 지하실 안으로 나를 앞서 성큼 발을 내딛었다. 내 얼굴이 빨개졌다. 나의 긴장은 최고도에 달했다. 앉아 씨가 나를 보더니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완전 쫄보네! 겁이 나서 아내를 데리고 온 거야? 참 대단하네!”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보나마나 앉아 씨는 아내랑 혈액형이 같고, 별자리가 같고, 요즘 유행하는 MBTI도 같을 거다. 화나면 참지 못해 마구 퍼붓는 게 꼭 닮았다. 아내는 의자의 빨간 천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상태도 좋네.”
휴우후 하고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내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살짝 웃어보였다. 다행히도 아내는 자기를 꼭 닮은 성깔 있는 의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의자 위의 텅 빈 공간을 쳐다보며 인상을 구겼다. 욕지거리가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나는 일부러 앉아 씨 위로 거칠게 털썩 앉았다.
“어때 정말 괜찮지? 지하실도 좀 더 정리하고 나면 한결 좋아질 것 같지?”
나는 아내의 동의를 구하며 엉덩이를 의자에 비볐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라고는 그것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독한 냄새의 방귀라도 발사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앉아 씨는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이 더러운 엉덩이 치워! 싫어!”
나는 의자의 쿠션을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쿠션도 아직 빵빵해!”
아내는 철없는 남편의 어리광이라도 보는 듯 한심하다는 눈빛을 한 번 보내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아내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저거 당근에 팔자!”
나는 깜짝 놀랐다.
“에이, 뭘 그래? 남이 버린 거 주워온 건데 그냥 여기서 쓰자.”
“이거 상태 정말 좋아.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데서 온 거 같아. 이걸 왜 버렸지? 하나에 15만 원씩 내 놓자. 그럼 30만 원이야!”
“글쎄, 나는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 같은데…….”
아내는 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지하실을 나섰다. 아내라면 능히 저 의자를 팔려고 내놓을 것이다. 아내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내를 쫓으며 나는 의자를 돌아봤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지만, 나만 알아듣는 소리가 있었다.
앉아 씨와 나는 서로 귀신들린 게 맞았다! ‘환장’의 짝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