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저는 의자예요!”
“저기요! 일어나요! 어서요!”
몽롱한 정신 너머로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러나 간절하게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 그 소리 때문이었을까? 나는 끄으응 하는 앓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가 나를 막 지나쳐 간 것 같았다. 여자의 뒷모습만 보였다.
저 사람이 나를 깨우고 간 걸까?
나의 행색은 술 취한 사람이 인사불성으로 의자에 널브러져 앉아 있는 바로 그 꼬락서니였다. 머리를 만져봤다. 조금 부은 것 같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다행히 두 번째 의식불명은 큰 소란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물론 지금까지는.
주변을 살펴봤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어쩌지? 일단 후퇴?
아니! 이왕 시작한 거, 마무리를 해야지!
걸터앉아 있던 의자를 들었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다. 의자 무게 때문에 열다섯 걸음이 스무 걸음으로 늘어났다.
‘젠장! 문을 열어두고 나올걸!’
출입문 앞에 의자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문에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며 의자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시 나가려는 순간 동쪽 빌라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작은 통을 들고 오는 게 보인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오는 것 같았다. 문에 매달아놓은 종이 울리지 않게 조심스레 출입문을 닫았다. 초조했다. 하지만 기다려야만 한다. 그 사이 갖다 놓은 의자를 어둠 속에서 찬찬히 훑어보았다. 다행히 부러진 데도 없이 멀쩡했고, 삐걱거리지도 않았다. 헤진 데도 없어 보였다. 단순하면서도 견고함이 느껴지는 디자인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훌륭했다. 흐뭇했다. 미소가 절로 새어나왔다.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좌우를 살폈다. 잽싸게 일을 시작했다. 이미 만족감을 맛본 상태여서인지 이번에는 좀 가볍게 느껴졌다. 스무 걸음이 열여덟 걸음으로 줄었다. 출입문을 닫았다. 땀이 찼다. 하지만 이 정도야! 아직 또 일이 남아있다.
일단 의자를 집안에 들이는 데는 성공했고, 이제 최종 목적지로 의자를 옮겨야 한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아내가 깨지 않게! 다시 한 번 기분 좋은 긴장이 나를 사로잡는다. 의자를 막 드는 순간,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쓰레기 수거 차량 특유의 거칠고 묵직한 엔진 소리가 문밖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휴우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마 조금만 늦었으면 의자를 얻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이토록 적절한 우연과 절묘한 타이밍, 그게 얼마나 중요한 삶의 기술인지!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몰래 이 짓을 하는 걸까? 정 필요하면 낮에 갖고 와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텐데, 굳이 야밤에 도둑질 하는 것 마냥 혼자 주책을 떨고 있는 걸까?
남이 버린 것을 갖다 쓰는 게 창피한가? 아니, 그렇지는 않다. 나는 당근마켓에서 누군가 쓰던 물건을 사다 쓰는 걸 좋아한다. 필요하면 새것이든 중고이든 크게 상관없다. 지금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당근마켓에서 직접 거래했다!
혹시 아직 충분히 늙지 않은 나이에 이미 지독한 구두쇠의 경지에 이른 걸가?
아니면 일종의 수집광이거나 견물생심인가?
그것도 아니면 소소한 도벽盜癖?
의자의 최종 목적지는 지하실이다. 이제 막 주어온 의자처럼 길거리의 사물들은 나의 망명정부의 중요한 새 식구가 될 것이다.
좋아보여서 샀지만 제일 좋은 것이 못 되어 한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것들.
그 자체로는 나쁘지는 않지만 주변과 딱히 어울리거나 빛나지 않아 소홀히 취급받던 것들.
누구나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것들.
열 개 중의 하나이어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하고 흔한 것들.
맵거나 짜거나 달지 않은 심심한 것들.
결국은 나를 닮은 것들.
나는 그런 것들이 좋았다.
나의 지하 망명정부는 그런 것들로 구축될 것이다!
갖고 있던 것들 중에서 몇 개가 이미 지하로 내려왔고, 거리에서 발견된 것들이 하나 둘씩 덧붙여졌다. 물론 생각과는 달리 거리의 것들 중에는 다시금 버려지는 것도 있었다. 그럴 때면 마치 내가 사물들의 사형집행인처럼 느껴져서 미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오지랖 넓은 박애주의자가 아니었고, 그저 나이거나 나를 닮은 것들을 원할 뿐이었다. 나의 자화상에 아프리카인의 눈, 인도 여인의 코, 이탈리아 성악가의 입을 꿰어 맞출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닥터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 과학이나 지식이나 모험을 원하는 게 아니다. 여태껏 없던 것을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럴 깜냥이 못 된다. 지상에서 얻지 못한 방 한 칸을 지하에나마 조촐하고 소박하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 다만 그 뿐이다. 길거리 사물들은 내 눈썰미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재료들이다. 그것들은 이 세상이 나에게 베푸는 유일한 호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새벽녘, 도둑고양이처럼 남이 버린 것들을 갖고 온다. 수집이라고 말하면 너무 고상하다. 차라리 견물생심, 도벽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비난 받아도 나는 상관없다.
지하실 문은 요란하게 열렸다.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한들 소리가 안 날 수 없는 슬라이딩 구조의 미닫이 문이어서 어쩔 수 없다. 아내가 깊이 잠들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마 아내는 푹 자고 있으리라. 아내가 이 시간에 깨는 일은 거의 없다. 늘 잠이 모자란 아내였다. 잠이 보약이고, 밥이 보약인 아내였다. 게다가 아내는 휴대폰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잔다!
의자를 갖고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어렵다고 안 될 일은 아니었다. 땀이 또 났다. 잔뜩 웅크린 자세로, 최대한 소음을 줄이며 10여분의 사투 끝에 마침내 계획한대로 하나는 계단 끝에, 하나는 지하실 안에 갖다놓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계단 밑에 자리 잡은 의자에 앉아보았다. 지하실 계단 위로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시금 흐뭇했다. 의자 옆 선반에는 축구화 아홉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 축구화도 중고냐고?
천만에!
거의가 해외에서 직구한 순정품들이다!
아, 물론 누가 내다버린 축구화도 한 켤레 있다. 하지만 그 아디다스 축구화는 신을 용도가 아니라 해부용이다. 축구화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분해해볼 생각에 클린하우스에서 주워온 것이다.
그럼 축구화는 중고를 신지 않냐고? 아니다. 내 발 사이즈에 맞고 내 스타일에 맞는 것을 준다면 얼마든지 OK!
축구화 밑에 놓여있는 축구공 3개는 전부 학교 운동장에 버려진 것들을 주어온 것이다. 다 쓸 만하다. 아주 성한 것들을 내가 속한 축구동호회에 기부를 했고, 연습용으로 남겨둔 것들이다.
이번에는 원래 쓰던 의자에 앉아서 새로 의자를 들여놓은 지하실 풍경을 바라보았다. 헌 의자는 여기서 이렇게 새 의자가 되었다! 다소 칙칙한 지하실 공간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역시 주워온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의자를 바라봤다. 의자가 새로 들어왔으니 지하실의 레이아웃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후에! 어쨌든 이렇게 오늘도 보람찬 하루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희망에 부푼 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저기요.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의자에서 일어나 계단 쪽으로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어디에선가 들리는 목소리! 어쩐지 한 번은 들어봤던 것 같은 목소리!
환청인가? 손바닥으로 귀를 타다다닥 치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얘기 좀 하자니까요!”
클린하우스에서 잠깐 의식을 잃고 의자에 널부러져 있던 나를 깨우던 바로 그 목소리!
머리칼이 쭈뼛 섰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너무 긴장했나? 아니면 너무 흥분했나? 아까 나를 깨운 건 뒷모습만 본 그 여자 분이 아니었나?
머리가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머리를 만져봤다.
“놀라지 마세요! 저는 의자예요!”
나는 의자를 쳐다봤다. 의자는 앉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 위는 텅 빈 공간이었다. 나는 겁에 질렸다. 머리칼에서 땀이 났다. 머리가 질끈 아팠다.
“어머! 이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