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복수는 너의 것
“오하루 씨가 보는 지금 제 모습은 저를 아끼던 주인의 모습을 많이 닮았을 거예요. 그 분은 아빠의 시간과 추억이 배어있다며 저를 무척이나 많이 아꼈죠. 저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요. 그래서 결혼하면서 저를 신혼집에까지 들여다 놓았어요. 그런데 남편이라는 작자가 바로 이 의자 위에서 불륜을 저질렀어요. 어느 날 조금 일찍 들어온 주인이 그 현장을 목격한 것이었어요. 제 주인은 남편을 버리고 저 또한 버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내 주인이 불쌍하고 내 처지 역시 억울해요. 저를 아끼던 주인의 삶이 한순간에 꺾여버리는 게 너무나도 안타까워요. 그리고 저 역시 남편이라는 작자의 못된 행동 탓에 이렇게 무참히 버려지는 게 너무도 분해요.”
아마 앉아 씨가 사람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눈물 같은 것을 보였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앉아 씨 그러니까 의자의 정령은 그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가 울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 결국, 이거였군. 조선시대 복수극을 벗어나지 않는군. 이로써 무참히 짓밟힌 내 판타지여!
나는 앉아 씨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잠시 허공을 쳐다봤다. 지하실 천장의 복잡하게 얽힌 배관들이 눈에 밟혔다. 대낮에 귀신과 대화하는 지하실 남자의 심정을 어쩌면 저리도 닮았을까.
나는 다시 앉아 씨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앉아 씨는 사실 억울할 게 없지 않아요? 어쨌든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됐잖아요? 이 지하실과 나라는 사람!”
나는 양 팔을 가볍게 벌리며 말했다. 앉아 씨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이 공간과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우리 사물들은 공간과 사람을 선택할 수 없어요. 단지 받아들일 뿐이에요.”
“앉아 씨! 생각해봐요. 당신은, 썩 만족스럽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이제 다시.”
앉아 씨가 나의 말을 자르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지금 현재에 만족하고 복수 같은 건 잊어버려라. 너는 어쨌든 살아있으니 쓸데없이 사람들 일에 상관하지 말아라. 그걸 말하려는 건가요?”
“네. 사실. 사실 그래요.”
나 역시 피하지 않고 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당신의 의자로 살아야 할 것이고, 시간과 당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겠지요. 네. 그게 전부이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당신과 마주할 제 미래의 모습이에요.”
낮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애써 감정을 누른 소리였고, 예언과 체념이 섞인 말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뭔가를 보태야했지만 보탤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한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앉아 씨 눈에는 내가 남몰래 쓰레기나 주어오는 골목길 하이에나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는 거라고! 내가 앉아 씨에게 이토록 비난받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궁색하기 그지없는 변명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반말을 했다.
“저도 당신을 상대로 무슨 ‘의자 권리선언’이나 ‘사물 권리장전’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억울하다는 것뿐이에요. 그런 제 목소리를, 우연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이라는 사람이 듣게 된 것 뿐이에요.”
의자의 정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니 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일종의 운명이나 숙명 같은 것을 정확히 나에게 말했다. 나는 곤혹스러웠다. 나는 의자 정령의 슬픈 운명에 동정심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나만의 지하실이 소중했고, 나만의 세계를 거의 대부분 자본주의 방식대로 시장에서 구입한 물건들로 그리고 아주 작게는 남들이 버린 물건들을 활용해 꾸미고자 했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나는 나의 세계를 무너트리려는 그 어떤 시도와도 싸울 수는 있지만, 이제 막 얻은 작은 의자 세트로 나의 세계가 엉뚱하게 흔들리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나는 궁색한 변명에 이어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자의 정령이 입을 열었다.
“이제 다시 저를 내다버릴 건가요?”
정령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오래전 버릇이 이 순간 느닷없이 도진 것이었다. 젠장, 나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나만의 공간인 지하실을 업그레이드 시켜줄 소품인 것은 확실하지만, 이런 불편함과 불협화음을 견디면서까지 이 의자를 이곳에 두고 싶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시금 내다 버리는 게 확실히 정답이었다. 게다가 사물들의 목소리, 그러니까 사실 귀신과 다름없는 것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정상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나는 내심 마음을 다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마음에 아주 현실적인 한 스푼의 낙관적인 희망도 소리 없이 얹고 있었다.
여기에 맞춤한 의자는 언제고 다시 나타날 것이다! 기회는 분명 다시 생길 것이다! 하이에나일지언정 기다릴 줄 아는 하이에나가 되면 되는 거야!
내가 입을 막 열려고 하는 순간 앉아 씨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의 리얼리즘이 곧 나의 리얼리즘이에요.”
앉아 씨는 벽면에 걸린 자그마한 체 게바라 액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불이 붙은 시가를 오른 손에 들고 얼굴을 약간 숙이고서는 뭔가를 집중해서 읽고 있는 털쟁이 혁명가의 사진! 버려진 책 묶음에서 우연히 발견해 액자로 만든 사진! 그 밑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Be Realistic, demand the impossible!)
체 게바라가 했다는 유명한 말을 손 글씨로 써놓은 것이었다. 앉아 씨는 용케도 그것을 발견해 나를 비꼬며 빗대어 말한 것이었다. ‘너의 수준에 따라 나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라고.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앉아 씨의 손을 따라 액자를 바라본 순간, 사진 속의 게바라가 나를 보며 씩하고 웃는 것이었다! 웃음소리도 들렸던 것도 같았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질겁했다. 체 게바라도 귀신으로 나의 지하실에서 살고 있었나? 물론 착각이었다. 그 이후로 지하실의 체 게바라는 두 번 다시 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체 게바라의 액자에는 정령이 깃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순간 나는 완전히 궁지에 몰렸고, 나의 패배를 직감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 나를 구원한 것은 아내의 전화였다.
아내는 전화가 속에서 외쳤다.
“오하루! 또 지하실이야? 빨리 올라와!”
다짜고짜, 앞뒤 없는 아내의 짜증어린 목소리였다. 나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런 아내의 말을 정말이지 싫어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통과한 아내의 발음은 불분명했고, 그나마 들리는 말이라곤 언제나 짧은 명령조였다. 그 둘 다 싫었다. 그러면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내의 목소리가 정녕 반가웠다.
나는 앉아 씨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쓱했지만, 비겁하게 등을 돌리는 것이었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래, 어쩔 수 없어. 남들 눈에는 삭막하고 볼품없는 이 지하실을 잘 지켜내만 한다고! 틈만 나면 지하실에 처박히는 나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런 이해를 바라지도 않아. 나는 이곳을 잘 지키면 돼. 귀신이든 정령이든, 앉아 씨도 마찬가지야. 지키기 위해 버리는 거야. 그것이 최선이야.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르며 나는 생각을 굳혔다.
가게에 들어서니 아내가 잔뜩 긴장한 눈빛을 하고선 고개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아내의 턱짓을 쫓아 보니 웬 낯선 사내가 있었다. 그 손님을 상대하라는 얘기였다. 가끔씩 출몰하는 술 취한 동네 아저씨인가 싶었다.
“뭐 필요한 게 있으세요?”
조금 전까지 앉아 씨와의 갈등에 내 인상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애써 바로잡지 않고,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앉아 씨는 힘겨웠고, 아내에게는 짜증이 났고, 이 아저씨는 성가셨다.
하지만 그 남자는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 내게 반갑게 눈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나를 이모저모 살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서 뭐 달라진 게 없나 하고 살피는 것 같았다. 포옹은 아니어도 최소한 악수 정도는 해야만 할 것 같은 친밀함이 묻어났다.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인가? 나는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