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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로 Oct 24. 2024

안녕, 나의 풍란!

009-안녕, 나의 풍란!


몸이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결국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는 아내와 각방을 쓰는 게 참 다행이다 싶었다. 아내와 나는 지금 한 집에서 별거 중이었다. 아내가 이혼하자고 말을 꺼낸 이후부터 그랬다. 


첫 번째 의식불명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우리는 이혼에 관해 다시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남들이 보기에 참으로 다정한 부부처럼 지낸다. 타인들을 의식한 가면극은 아니다. 실제로 다정하게 생활한다. 웃고 떠들고 농담하고. 함께 노동하고, 살림하고, 계획한다. 하지만 내가 내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아내 역시 그럴 것이다. 내일 아침, 누군가가 “우리 헤어져!”라고 말하면 우리는 바로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아내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아내와 충돌하는 것을 피했다. 더 이상 나를 주장하고 고집하는 데 애쓰지 않았고, 아내의 의견과 취향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내와 같은 삶의 계급에 있지 않았다. 아내 역시 나와의 전선에서 어디에서 멈춰야 할 줄을 알았다. 그렇게 둘 다 나름의 방법으로 위태로운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아내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니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두 세 걸음 더 거리가 생겼다. 외출을 하지 않았다. 집 계단을 내려가 차고를 개조한 가게로 갔고, 또 아침의 계단을 올라 퇴근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만나게 되면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끊었고, 왕래는 더 더욱 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니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따라서 줄어들었다. 휴대폰 화면에 뜨는 뉴스를 클릭하는 게 세상 소식의 전부였다. 그리고 이런 무관심을 증폭시켜준 것은 나의 빈약한 기억력이었다. 원래 기억력이 좋지 않았는데, 기억하지 못하니 마음과 머리에 붙들어둘 일들이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나는 세상과 상관없이 가벼워졌고, 내 세상은 가벼웠다.


오랫동안 마음에 새겼던 것들에도 빗장을 걸었다. 작가에 대한 욕망도, 책읽기와 음악에 대한 열정도 미련 없이 버렸다. 꽃과 나무나 와인에 대한 소소한 관심 같은 것도 접었다. 단순하고도 무색무취하게 변하고 싶었다. 시간은 나랑은 상관없이 쉬지 않고 흘렀다.


새벽의 시간은 검다 못해 푸르렀다. 집 밖 놀이터에 있는 정자에 앉았다. 밤새 누군가가 술을 마셨던 듯 맥주 캔과 담배꽁초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시간은 안녕했을까?


“이제 다시 나를 내다버릴 건가요?”

“그 눈으로 고른 것들은 다 빛이 날거요. 마치 돌 속에 금이 숨어 있듯이 말이오.”


앉아 씨와 할리데이비슨의 말 사이에 나는 있었다. 각각의 말은 처음에는 평행선처럼 아주 멀리 나란히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 말들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아니, 밀어내려고 할수록 더 더욱 완강하게 나를 죄어오고 있었다. 말들은 마치 나를 압사시키려는 듯 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무당도 아니고, 해결사도 아니야.’

‘여태껏 살면서 내가 선택한 일들은 대부분 실패했어.’


마음이 심란했고, 괴로웠다. 외롭고 쓸쓸했다. 어제 새벽에 다쳤던 머리가 다시 아팠다. 머리를 쓰다듬어봤지만 겉으로는 이상이 없어보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의자를 지금 갖다 버릴까?


하지만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는 못한 채 지하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코끝에 진한 향기가 느껴졌다. 어제 낮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향기였다. 왠지 친숙하면서 익숙한 향기. 하지만 동시에 아주 먼 추억의 한 끄트머리를 끄집어내려는 듯, 아주 오래된 곳에서 오는 것 같은 향기. 나의 것이 아니지만 나만의 것이라 여겼던 은밀한 향기.


그 향기를 찾아 나는 두리번거렸다. 


아, 풍란이었다! 


화분에 심어진채로 아주 오랫동안 방치해둔 풍란 두 그루에서 꽃이 핀 것이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꽃 핀 풍란의 향기였던가! 나는 풍란에게 고개를 떨궜다. 고마웠고 미안했다. 왈칵 눈물이 났다.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이었다.


꽃이 나에게 말을 걸어줄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대학 시절. 그러니까 군대도 갔다 온 복학생 시절. 6년간 사귀었던 첫사랑이었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그녀에게 딴 남자가 생겼다. 헤어지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그동안 고마웠어. 네 덕택에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알 수 있었어. 


진심이었다. 나의 말에 나의 사랑이었던 그녀는 울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이별의 아픔까지 억지로 참을 수는 없었다. 나는 몹시도 괴로웠다. 모든 것이 위로가 될 수 없었던 그때 우연하게 풍란을 키우게 됐다. 빨간 플라스틱 포트에 담겨 2천원 정도 하던 풍란이 내 곁에 네  다섯 개 있었다. 내가 화원에서 산 것인지 그 전부터 있었는데 내가 그 존재를 몰랐던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다. 좀 더 멋있게, 낭만적으로 말해보자!


김춘수의 그 오래된 시에서처럼,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풍란은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 


매일 뿌리를 감싸고 있는 수태에 물을 주었고, 가늘고 길쭉한 잎에는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주곤 했다. 꽃이라고는 난생 처음 키워보는 완전 초보의 눈에 식물의 세계는 미묘했고 매혹적이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마음껏 요동쳤다. 그들은 매일 똑같았지만 늘 조금씩 달랐다. 그들의 시간은 나의 시간과는 달랐고, 나는 그들의 시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풍란과의 시간 보내기가 어느 정도 되자 이번에는 풍란이 나에게 말을 걸어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무언가 위로의 말이든, 우정의 말이든, 혹은 아무 말이든 뭐가 됐든 말을 걸어줄 거라는 생각!


나는 하루에도 몇 시간이고 풍란을 쳐다봤다. 잠에 들 때에는 머리맡에 두기도 했다. 집밖으로 함부로 나가지도 않았다. 내 눈은 자동차 헤드라이트 마냥 빛나고 있었고, 내 귀는 토끼 귀 마냥 쫑긋 솟아있었다. 꼭, 꼭 한번쯤은 말을 걸어줄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을 정말이지 고대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초조한 기다림이었다.


내가 그 기다림에 대해 친구들에게 털어놓자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동정과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며 내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 상담 좀 받아보는 게 어때? 요즘은 그런 게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아!”


“지랄 염병하네. 작작 좀 해라!”


그렇게 화를 내는 친구도 있었다. 제각각 나를 위한 우정의 방식들이었다. 


또 누군가는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했고, 술을 사주겠다고 했다. 여자는 싫다고 했고 술은 좋다고 했다. 


풍란들은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끝끝내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이 할 일만을 했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풍란은 꽃을 피웠다. 꽃 핀 풍란의 향기는 가히 황홀했다. 밤의 공기를 압도했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풍란은 결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순간 대화에의 희망을 접었고, 그렇게 나는 이별의 아픔에서 회복했다. 나의 새로운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축배를 들만큼 화려한 삶은 아니었지만, 독배를 마실 만큼 처참한 것 또한 아니었다. 그 나이 또래 누구나 겪을 일들을 겪었고, 행운과 불운 그리고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그저 그런 삶이었다. 


그때의 풍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풍란은 세 개가 살아남았다. 둘은 마치 양념통처럼 두 화분이 붙어있는 도자기분에 담아 마당 한 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풍란의 꽃이 진 어느 볕 좋은 가을 날 집 근처 공원에 있는 이름 모를 커다란 나무의 가지에 붙여 놓았다. 


나는 그 이후로 풍란을 키우지 않았다. 아니, 철저하게 외면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었다. 마당 구석의 풍란에 신경 써서 물 한 번 준 적이 없었고, 공원의 나무를 찾아 풍란의 안부를 살핀 적도 없었다. 심지어 나는 그들에게 나의 슬픔을 받아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냉정하고 잔인한 방식의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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