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박물관과 클린하우스
풍란 앞에서 소리 없이 마음껏 울고 나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해 울었던 게 그 얼마만인가. 머리가 파랗게 맑아지는 것 같았다. 마음에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풍란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 손길이 닿은 풍란은 파르르 떨며 탄성 있게 움직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풍란의 향기! 그리고 나와 사물의 말!
원래 풍란은 여름에 꽃을 피우지만, 그때의 풍란은 겨울의 한복판에서 내게 꽃을 보여주었고 진한 향기마저 내뿜어주었다!
나는 사물의 경계를 허물라고 막무가내로 다그쳤고 풍란은 놀랍게도 실제로 그 경계를 허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다만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만을 원했던 것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첫사랑의 입술만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눈 먼 소망이었고, 눈 뜬 악몽이었다. 오늘, 이 새벽의 풍란 향기는 마치 게릴라처럼 나를 덮쳤다. 풍란은 나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미처 갚지 못하고 떠나버린 지난날의 부채에 대해서! 아니, 일방적으로 끝나 버린 드라마의 정당한 마무리를!
그랬다. 한여름 새벽을 메우는 풍란의 향기는 실연으로 파탄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준 모든 시간과 사물들의 오래된 목소리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몹시도 이기적인 도망자였고, 배은망덕한 두 발 짐승이었다.
풍란의 향기는 지하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앉아 씨와 체 게바라가 있다. 아마 또 다른 정령들도 있으리라. 아무튼 이제 그곳으로 가야한다. 가서 만나고, 들어야 한다. 이번에는, 지난날 풍란이 내개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들의 풍란이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지하실 사물들. 낡아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오디오, 손때가 곱게 묻은 반닫이, 서툴게 빚은 점토 화분, 동으로 만들어진 전등 갓...... 그들이 보였다. 그들의 정령이 보였다. 그들 모두는, 어느새 나를 닮아있는, 나의 귀신들이었다. 오디오는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고, 반닫이는 슬퍼보였다. 화분은 화가 나있었고, 전등갓은 우울해하고 있었다. 나의 사물들은, 나의 귀신들은 나의 공간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불행을 쌓아두고 있는, 쌓아두고 불행을 키우고 있는, 나쁜 키퍼였다. 불륜 상대로 늘 새로운 사물들만을 쫓는 탐욕스러운 한 마리 하이에나에 불과했다. 나의 지하 망명정부에서 나는 홀로 고고한 척 하는 독재자였다. 지하 망명정부는 나로부터 오염됐다.
나는 앉아 씨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이제 정말 들을 준비가 됐어요. 말 좀 해 줄래요?”
풍란의 이끌림에 지하실로 내려와 앉아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우연치고는 참으로 엄청났다. 앉아 씨의 키퍼 남편은 할리데이비슨 아저씨가 남기고 간 전시회 초대장에 인쇄돼 있는 바로 그 이름이었다.
이 아저씨는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앉아 씨가 나타났고, 할리데이비슨 아저씨가 그 다음이다?
나에게 나타난 순서대로라면 아저씨가 먼저고, 앉아 씨가 나중인데?
그 아저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앉아 씨가 원하는 복수라는 게 어떤 거죠?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랬다. 아무리 사물의 정령이라 한들, 인간에 대한 복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어쨌든 이로써 내게 뜻하지 않은 책임이 떨어진 꼴이었다. 하지만 이미 각오한 일이기도 했다. 풍란 그리고 앉아 씨, 그리고 내가 외면한 것들에 대한 책임은 이제는 짊어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해서도!
가게의 휴무일에 변하기 전시회를 보러 아내와 함께 외출을 했다. 식자재 마트에 장보러 가는 걸 빼고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내는 조금 들떴는지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다. 성심성의껏 대답을 했다. 분위기는 사뭇 유쾌했다. 그러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 아내에게 말했다.
“박물관博物館과 클린하우스Clean House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뭘까?”
“그 둘을 함께 비교할 수가 있어? 용도 자체가 다르잖아.”
“글쎄, 용도가 정말 다를까?”
“박물관은 보여 주기 위해 유의미한 것들을 모으는 곳이고, 클린하우스는 버리기 위해 모으는 것이잖아. 그게 어떻게 같을 수가 있지?”
“첫째, 온갖 게 다 모여 있으며,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다. 둘째, 연중무휴로 운영한다. 클린하우스는 당연히 그렇지만 박물관 역시 ‘월요일 휴관’처럼 아주 제한적인 휴일을 빼면 사실상 연중무휴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시간에 따라 아이템의 차이를 둔다. 플라스틱, 종이류 등은 요일별로, 음식물 쓰레기, 캔과 고철, 스티로폼 등은 매일 배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클린하우스처럼 박물관 역시 상설전시와 기획전시 등으로 자신들의 아이템을 관리한다. 마지막으로는 이용 시간에 제한이 있다. 클린하우스는 오후부터 새벽까지, 박물관은 오전부터 오후까지 문을 열어놓는다. 어때? 제법 그럴싸하지 않아?”
“그렇게 박물관과 클린하우스는 닮은꼴이다?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차원만 보고 그 둘을 동일시하는 논리라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같다, 그러니까 박물博物이 일물一物이라는 건데, 그러면 모든 관계들은 아주 클린해지겠는데.”
모든 게 같아서 클린해지는 관계! 이것과 저것의 경계가 사라지는 관계. 지금 아내는 그런 관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보고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아내였다. 달라서 힘들다고, 나보고 달라질 수는 없냐고 말한 것도 아내였다. 그래서 나는 나를 포기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를 닮을 수 없다면, 적어도 차이는 없애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지하 망명정부에서만 겨우 나는 나로서 버틸 수 있었다. 땅 위는 늘 위태로웠다.
변하기의 전시회는 독특했다. 시립 박물관 특별 기획으로 열리는 전시회였지만, 마치 프라이빗 파티처럼 초대장 없이는 입장이 안 되는 무료 전시였다. 공립 박물관의 성격에 어울리는 무료 전시였지만, 누구나 볼 수는 없다?
전시회장 입구에는 방명록이 비치돼 있었는데, 관람객은 자신이 갖고 있는 초대장에 새겨진 일련번호를 찾아 방명록을 작성해야 됐다.
할리데이비슨 아저씨가 남기고 간 초대장의 일련번호는 놀랍게도 001번이었다. 그러니까, 제일 첫 번째로 초대받은 손님이라는 뜻이었고, 최고의 VVIP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내 초대장을 확인한 입구에서 안내를 담당하던 큐레이터도 적잖이 놀라는 것 같았다.
“저기 죄송한데,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하더니 잠시 자리를 벗어나 누군가와 황급히 전화 통화를 했다. 통화를 하며 잠시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훔쳐보듯 바라보기까지 했다. 아마도 자신들이 ‘넘버 원’으로 초대한 사람이 아니라 엉뚱한 인물이 난데없이 등장해서 그런 것 같았다.
혹시 입장이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긴장이 됐다. 통화를 마친 여자는 웃으며 다가왔다. 그 웃음에 나는 더욱 긴장했다. 거절에 앞서 으레 미소가 등장한다는 것쯤을 서비스업을 하는 자영업자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입장이 거부당하지는 않았다. 안내 담당은 책자 형태의 두툼한 팸플릿을 건네주었다.
“작가님이 지금 급한 다른 일정으로 외출 중이셔서 직접 안내를 할 수 없게 돼 죄송하다는 말씀이 있으셨고요, 제가 대신 안내와 작품 설명을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아, 네.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저희 둘만 혼자 볼 수는 없나요?”
“아뇨. 원하시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관람객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각자들 스스로 알아서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안내 요원의 제안은 일련번호 001에게 주어진 특별 혜택 같은 게 분명했다. 나는 전시장 바닥과 벽면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천천히 작품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플라스틱과 고가구 목재로 조립한 AI 로봇이 전시회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로봇의 이름은 ‘반플반수’였다. 반갑게 인사해야할지, 피해야 할지 관람객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최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종의 실험처럼 보였다.
로봇을 이리저리 피하고 나면, 이번 전시회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 ‘고난의 순례’가 나왔다. 엄청난 양의 운동화 끈을 꼰 후 타카를 쏘아 만든 십자가인 그 작품은 사뭇 위압적이었다. 마치 무릎 꿇고 고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종량제 봉투를 이어 붙여서 그 위에 사람들 얼굴을 그려, 전시회의 벽면은 물론이고 바닥과 천장까지 장식하고 있는 ‘나의 모나리자’ 연작에서는 약간의 위트도 담겨있었는데, 그 위트를 종이박스로 만든 관棺 ‘완전연소’와 과감하게 충돌시켜 배치함으로써 일종의 충격요법을 노리고 있는 듯도 했다.
변하기는 시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지닌 작가였다. 대중적인 취향과 예술적인 감각을 교묘하게 섞어, 둘 다 만족시키려 애쓰는 것 같았다. 작품들을 다 보고 전시회장을 나서려 하자 어느 틈엔가 큐레이터 여자가 나타나서는 방명록을 내밀며 작성해달라고 말했다.
사실 방명록 작성은 처음이라서 어떻게 할지 몰랐다.
“제가 이런 건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그렇게 물으며 뒷장들을 넘겨보았다. 방명록에는 일련번호가 크게 적혀있었고, 그 밑으로 작게 이름과 직위 등이 있었다. 방명록을 채우고 있는 명단들은 이른바 사회적 지도층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부와 지자체의 고위 관료들, 기업 회장이나 사장들, 언론사 간부들 하는 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비난받을만한 시대착오적인 방식이었지만, 의도적인 전략이라면 꽤나 성공적인 방식이기도 했다.
‘이 작가 나중에 정치하려고 이러나?’ 싶었다.
일련번호와 이름 옆의 메모 칸에는 칭찬들이 넘쳐났다.
- 놀라운 작품! 곧 세계적인 거장이 되길!
- 매번 감탄합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비주얼 퍼포먼스!
- 한국 미술의 희망!
방명록 맨 앞장, 그러니까 001 페이지에는 다른 페이지와 달리 이름과 직위가 적혀 있지 않았다. 할리데이비슨 아저씨가 진짜 이 초대장의 주인공이 맞나 싶어졌다.
그럼 누굴까?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이 인물이 궁금해졌다.
의자.
주운이.
딱 그렇게만 두 줄로 적었다.
“의자 님, 주운이 님,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큐레이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살며시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죄송하지만, 이제 곧 작가님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됐는데, 만나보시고 가시지 않겠어요? 작가님이 꼭 뵙고 싶다고 하거든요.”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오늘은 아니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작가님이 만나길 원하는 사람은 제가 아닐 텐데요? 원래 이 초대장의 주인은 제가 아니거든요. 이미 아실 테지만.”
큐레이터는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내가 덧붙였다.
“아, 그리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내일 오후 5시에 작가님께 드릴, 선물이랄지 뭐랄지, 하여간 다시 올게요. 그래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