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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로 Oct 24. 2024

고도를 기다리지 않으며

011 고도를 기다리지 않으며



“언제부터 우리가 의자와 주운이가 됐어?”


아내는 재미있는 듯 웃었다.


“그냥 즉흥적으로 생각나서 썼던 거야.”

“어, 그런데 의자, 주운이라면 혹시 당신이 어제 주워온 의자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글쎄, 저 작가라면 분명 낡고 버려진 의자하고도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했지. 작품 스타일이.”


아내는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 작가 만나려고 내일 다시 올 거야?”

“응. 한 번 만나 보려고!”


아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시회장을 나와서는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셨고, 시간에 맞춰 연극을 보러 갔다. 오랜만의 데이트였다. 연극은 더 오랜만이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문학도였던 대학 시절 한 번 본 적이 있는 연극이었다. 연극을 보기 전 번역된 작품도 찾아 읽는 등 나름 의미 있게 본 작품이었지만, 짧은 기억력 탓에 연극을 봤다는 기억만이 남아있고, 디테일들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제 그만 가자!” “안 돼! 고도를 기다려야지!”라는 대사 정도만 기억할 수 있었다.


애써 추레하게 분장한 배우들, 그리 크지 않고 앙상하게 굽은 나무 한 그루만 있는 무대 위의 휑한 풍경, 특별한 클라이맥스나 반전이 없는 성긴 스토리, 의미가 특정되지 않은 채 반복되는 말들. 그런 것들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풍경들이다. 그 풍경 속에 아내와 내가 있었다. 


배우들은 젊었고, 열정적이었다. 무명의 젊은 연기자들의 열정이 묘하게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과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 늙고, 낡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 세상을 표현하기에는 아무래도 젊음은 너무 힘이 셌다.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우리 둘이 지탱하고 있는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아내나 나나 그 대답은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모든 게 다 전과 같아졌다. 각자의 역할을 하고, 각자 잠을 자러 갔다. 아내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아내는 없었다. 대신 편지가 한 장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아내가 집을 나갔다. 나를 떠났다. 


전시도, 공연도 좋았어. 행복했어!

그런데 나는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어. 오지 않을, 실체가 없는 그 무언가를, 연극의 두 사내처럼 기다리는 것을 그만둘 거야. 기다림이 주인공인 그런 삶을 계속 하고 싶지 않아. 


제발 고도가 와주기를 바랬어. 연극 속 두 사내가 몹시도 불쌍했어. 하지만 오지 않는 것은 오지 않는 거야. 희망은 그런 데에 그렇게 쓰는 게 아닐 거야. 나는 희망을 내 스스로가 고도가 되는 데에 써 볼 거야.


아, 참. 그런 생각도 들었어. 만약 무대 위의 두 사람이 남자와 여자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그랬다면 사랑에 대해 적어도 한번은 말하고,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과연 사랑도 그들에게 구원이나 희망이 되기에는 부족했을까? 나는 다른 대답이 필요해. 정답이 아니어도, 비난 받아도 상관없어.


아내는 편지의 끝에 자신의 이름, ‘차미례’ 세 글자를 유독 꼭꼭 눌러썼다.


내가 잠들지 않았다면, 아내는 집을 안 나갔을까?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잠들어 있어서 아내가 집을 나가기 편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내가 집을 나갔어요.”


내 목소리는 메말랐다. 


“알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알죠?”

“아내분이 새벽에 여기에 왔었어요.”

“네? 정말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갔어요. 우는......것......같았어요.”

“혹시 무슨 말 같은 건 없었나요?”


앉아 씨는 잠시 침묵했다.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오하루가 잘 보이네!” 


나는 그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앉아 씨도 말을 붙여오지 않았다.


나는 앉아 씨와 함께 주워온 다른 의자 앞으로 의자 하나를 당겨왔다. 발을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 



“일어......일어나세요!”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러나 계속해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가까스로 눈을 떴다. 앉아 씨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아, 이 세상에는 왜 자라고 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 다 깨어나라고만 할까? 이대로 오백년 정도만 잤으면!


“너무 곤하게 자서 깨우는 게 힘들었어요.”


그 순간 앉아 씨가 마치 진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과 생각이 낯설었다. 하지만 나는 서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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