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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로 Oct 24. 2024

의자와 십자가

012- 의자와 십자가


전시회장은 비교적 한산했다. 어제 봤던 아가씨가 나를 보고선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작가님이 조금 늦으신다고 금방 연락이 왔어요. 뭐 마실 거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마침 잘 됐네요. 짐을 좀 가져올게 있어서요.”


나는 차 트렁크에서 큰 포대기에 감싼 앉아 씨를 꺼내왔다. 이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손에 땀이 찼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앉아 씨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작자가 광분을 해서 앉아 씨를 들고 내리쳐서 부서지면 어떡하지?

앉아 씨를 낙인처럼 이 자에게 넘겨줘야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전시회장에 마련된 응접용 테이블 옆에 앉아 씨를 옮겨놓았다. 

포대기를 지금 벗길까 아니면 그 자가 보는 앞에서 벗길까?


나는 포대기를 벗겼다. 나는 전시장에 마련된 벤치 끝에 앉았고, 그 옆으로 앉아 씨를 마치 전시회의 특별한 오브제처럼 두었다. 환한 조명 아래에서 앉아 씨는 전시회장의 그저 그런 테이블이나 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드러냈다. 뭔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소박하면서도 섬세했다. 또 공교롭게도 앉아 씨의 뒤로는 변하기의 십자가 설치 작품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었다. 그것은 묘한 풍경이었다. 


그때 갑자기 앉아 씨가 다급하고도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자가 바로 그 여자에요!”


나는 즉각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 전시회의 큐레이터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변하기의 불륜 상대라는 뜻이었다. 그녀를 새삼 다시 살펴봤다. 지적이고 세련됐으며, 흔히 말하는 고양이 상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다. 찾아온 관람객들을 따뜻하고 맞았고 친절하게 작품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죠?”


앉아 씨가 초조하게 물었다.


“그냥,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것도 계획이라면 그게 계획이에요.”


아무런 계획이 없어서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가 없었다. 


“아, 저기 작가님이 오셨네요.”


큐레이터가 와서 말을 했고, 변하기가 급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늦어서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변하기는 정말 미안해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내게 인사했다. 그와 나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눴다. 변하기는 약간 망설이다가 말했다.


“사실 전시회 초대권 1번은 선생님이 아니시잖아요?”

“그렇죠. 제가 작가님이나 전시회 관계자로부터 초대권을 직접 받은 건 아닙니다. 제 가게에 어떤 손님이 두고 가신 거예요. 돌려주려고 갖고 있다가 마침 전시회에 와야 할 이유가 생겨서 뜻하지 않게 이렇게 도둑 관람을 하게 됐네요. 실례가 됐다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사과 하실 필요도 없고요. 여기 오신 분들 중에도 저희가 초대한 사람들과 일치하지 않는 분들이 꽤 됩니다.”

“1번으로 초대된 사람은 어떤 분인가요?”

“글쎄요. 그게, 참......“


변하기는 말끝을 흐렸다. 할리데이비슨 아저씨가 과연 1번 초대 손님일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지만, 어쨌든 둘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변하기는 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혹시 그 분이 이번 전시회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나요?”

“몇 마디 나누기는 했지만, 전시회와 관련해서는 전혀 대화를 한 게 없어요. 나가시고 나서야 초대권을 두고 갔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변하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할리데이비슨 아저씨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변하기에게 굳이 캐묻지 않고, 나는 ‘나의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죄송한데, 저 큐레이터 분도 함께 얘기를 했으면 하는 데요?”

“네?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변하기는 약간 머쓱해하면서도 큐레이터를 향해 손짓을 하며 말했다.


“하련 씨, 잠깐 이쪽으로 올래요?”


하련 씨라는 이름의 큐레이터와 변하기가 나란히 앉았고, 나와 앉아 씨가 나란히 있는 풍경이 마침내 그려졌다.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새삼 긴장돼 보였다. 그들 눈에는 나의 표정 역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혹시 이 의자 알아보시겠어요?”


나는 앉아 씨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앉아 씨로 향했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둘은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가 변하기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하련 씨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앉아 씨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 의자는....... 이게 어떻게 여기에...... 당신이 왜......”


변하기는 문장이 채 되지 않은 말들을 힘겹게 뱉어냈다. 그리고는 마치 해서는 안 될 말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실이가 보냈나요?”


변하기의 입에서 ‘현실이’라는 단어가 떨어지자 그제야 하련 씨의 표정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현실이’는 아마 변하기의 아내, 그러니까 앉아 씨의 원 소유주의 이름임이 분명했다. 하련은 얼굴이 상기되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 하련은 이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며 나를 맹렬하게 쏘아봤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앉자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현실’을 몰라요. 다만 이 의자가 당신들 불륜의 오브제로 쓰였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어요.”


그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앉아 씨를 바라봤다. 앉아 씨는 마치 하련이 나에게 하는 것처럼 그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앉아 씨 뒤로 십자가는 여전히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혹시 이 의자가 지금도 필요해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앉아 씨와 하련이 동시에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행패예요? 우리를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뭐예요?”


하련이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변하기가 고개를 살짝 돌려 하련을 쳐다보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다정한 몸짓이었고,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따뜻한 풍경이기에 충분했다. 하련을 위로하듯, 변하기가 말했다.


“이 의자를 들고 와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 거죠?”

“아무 것도 없어요. 난 단지 사실만을 갖고 여기에 와야만 했을 뿐이에요.”


나의 말에 변하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들 일에 이렇게 참견하는 건가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네요.”


변하기의 말투가 조금 공격적으로 변했다. 아마 내가 자신의 아내와 연관이 없고, 또 특별한 요구 사항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그렇게 변하는 것일 터였다.


그때 하련이 난데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출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새로운 관람객을 맞는다는 게 아마 그녀의 핑계였을 것이다. 우리 넷이서 대화하는 동안 여러 관람객들이 오고 갔지만, 한 번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었다.


“당신은 아직 지옥에 있는데 저 분은 혼자 달아나는군요.”


변하기는 내 말에 따라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씁쓸함이 담겨있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현실에게는...... 미안하죠. 미안한데, 이제 다 끝난 일이에요. 한 번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어요. 특히나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사실, 그렇더라고요. 혹시 이해하시겠어요?”


변하기는 푸념하듯 말했다.


“예술가 변하기도 역시 그런 건가요? 당신이 모은 오브제들은 기존의 쓰임새나 맥락과 다르게 모두 재활용되거나 재배치되고, 그럼으로써 새롭게 의미를 갖게 되고. 또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당신은 모든 것을 조립하고 모든 의미를 조율하는, 홀로 숭고하고도 높은 위치에 군림하는 건가요? 그게 당신에게는 즐거움이고 환희인가요?”


나는 앉아 씨 뒤에 있는 십자가를 가리켰다. 변하기도 나를 따라 십자가를 쳐다봤다. 변하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어쩌면 그는 내 말에 모욕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앉아 씨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혹시 그도 앉아 씨의 정령을 느낄 수 있을까, 라고 문득 생각했다. 왜냐하면 변하기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말은, 그러니까 내가 오브제, 사물들을 갖고 하는 작업이 또 하나의 불륜에 불과하다는 뜻인가요?”

“그런 말에 답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단지 사실만을 갖고 이 자리에 왔을 뿐이에요. 이 의자는 자신의 자리를 무참하게 빼앗겼다고 말해요. 이제는 그 누구도 이 의자에게 예전의 그 자리를 만들어 줄 수는 없어요. 그건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의 책임인가요? 나는 의자를 대신해 그걸 물었을 뿐입니다. 당신은 적어도 그 답을 해야만 합니다. 자,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나의 말이 끝나고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지옥의 침묵 속으로 하련은 돌아오지 않았다. 앉아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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