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오! 하루!
오늘따라 와인이 시큼달큼 했다. 혼술이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는 혼술은 아니었다. 앉아 씨를 앞에 두고 혼자 마시고 있으니까. 전시회장을 나오면서부터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지하실로 다시 앉아 씨를 옮길 때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내가 떠난 집은 적막했고, 지하실은 무거웠다. 부엌에서 한 잔을 마시다가, 누군가와 무언가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하고 싶어졌다. 지하실로 내려왔다.
“앉아 씨!”
내가 생각해도 취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느닷없는 호출이었고, 어쩌면 예정된 차례였다.
나는 앉아 씨가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어때, 복수는, 어땠어요?”
앉아 씨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와인을 조금 마셨고, 잠시 후 앉아 씨가 말했다.
“현실 님이 보고 싶어졌어요.”
앉아 씨의 말에 나는 마음이 상했다. 칭찬까지는 아닐지언정 뭔가 반응이 있어주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런 기대감을 여지없이 허물어버리는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당신을 버린 사람이 바로 그 현실이라는 사람이라는 걸 몰라요?”
나의 냉소적인 반응에 앉아 씨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도 버려진 당신을 구하고, 당신의 말에 귀 기울여 준 게 누군데. 아무리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고 오늘 일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해도, 최소한 감사 표시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보는데, 안 그래요?”
앉아 씨는 계속 입을 닫고 있었고, 술기운이어서 그런지, 앉아 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계속 혼자 떠들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오늘 앉아 씨의 복수극에 너무 신경을 쏟아서 그런가. 내일은 꼭 병원에 가야지’라고 생각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아내 없이 혼자 하는 장사 첫 날이었다. 당분간 쉴까 생각했지만, 쉬면서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정도로만 하자, 라고 생각하며 오전에 병원을 다녀온 후 가게 문을 열었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혼자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하지만 그 덕에 하루가 빨리 지나갔다. 가게를 마감하고서는 와인 한 병을 들고서 다시 지하실로 내려갔다.
앉아 씨를 마주하기가 조금은 쑥스러웠다. 어젯밤에 술기운에 횡설수설하다 잠이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지금 침대로 들어간다고 해도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달리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앉아 씨와 술 한 잔 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 유일한 선택이 결코 나쁘거나 피하고 싶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앉아 씨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아내 분 이야기 하는 거죠?”
“그래요. 내 와이프 차미례!”
“답은 이미 알고 있잖아요.”
“앉아 씨는 항상 말을 그렇게 해요? 앞뒤 없이 요점만! 그게 때로는 사람을 빈정 상하게 만들어요. 지금처럼!”
나는 또 어제처럼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어제처럼 머리가 아팠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적어도 이 저녁만큼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다.
다시 병원을 찾았다. 정밀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뇌혈관에 무언지 알아볼 수 없는 쇳조각 파편 같은 게 박혀있다는 것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그나마 다행히 아직까지는 한자리에 고정돼 있지만, 언제 어디로 움직여 혈관을 막거나 터트릴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도 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생명에 즉각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뇌 속에 일종의 작은 시한폭탄을 담고 살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리고 의사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했다.
“뇌의 압력을 높이는 것들을 최대한 자제하셔야 돼요. 음주와 흡연은 당연히 안 되고요, 운동이나 비행기 탑승, 과도한 스트레스도 피해야 합니다.”
힘든 수술이냐는 나의 물음에 “섬세한 수술”이라고 의사는 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리고 수술을 하려면 보호자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해요.”
“제가 사인하면 안 되나요?”
“네. 그건 안 됩니다. 혹시 결혼 안 하셨어요?”
“했는데, 지금 별거 중이에요. 형제들하고도 연락할 수 없고요.”
나는 그 순간 앉아 씨를 생각했다. 수술실 침대에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나와 수술실 밖에 수술이 무사하게 끝나기를 바라며 초조하게 앉아 있는 의자 하나!
의사는 두통을 호소하는 나에게 섬망이나 망상, 환각 같은 게 생길 수 있다고도 말했다. 약 처방으로는 어렵고 반드시 수술적인 치료로만 완치될 수 있다고 수술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의사의 말을 종합해보면, 평상시에는 머리가 아픈 미치광이 상태일 수 있고, 심하면 아무 때고 느닷없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거리를 좀 걸었다. 사람 없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눈에 이슬이 살짝 맺혔다.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버스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 가고 있었고, 자동차들은 제한된 차선 안에서 용감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해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가로수는 그래도 푸르렀고, 상점들의 간판은 소음과 먼지 속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 혼자 멈춰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많이 살았다고 느껴졌다. 다시 병원을 향해 걸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게를 열었다. 어제보다는 그래도 일이 수월했다.
저녁에 다시 앉아 씨 앞에서 어제 마시다 남은 와인을 마저 마셨다. 오늘은 취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횡성수설하지도 않았다. 앉아 씨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이 모든 게 나의 망상일까?
사물들의 정령을 알아본다는 게 정녕 환각은 아닐까?
아니, 반대로, 앉아 씨가 망상과 환각 속에만 존재한다면 어쩌지?
어제와 다른 오늘이었다.
다시 하루가 시작됐다. 모처럼 머리를 조금 잘랐고, 사우나를 다녀왔다. 넥타이도 오랜만에 걸치는 등 조금은 격식 있고 단정하게 차려 입었다. 그리고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오늘만큼은 당신 위에 앉아야겠어요. 잠깐이면 돼요.”
앉아 씨는 평소와는 다른 내 모습과 말에 조금 놀라는 것 같았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앉아 씨 위에 앉으려니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앉아 씨를 지하실로 들이고 나서 사실상 처음으로 제대로 앉아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의자를 앉아 씨라고 부르게 된 순간부터, 의자지만 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오하루입니다. 지금 제 유언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나는 앉아 씨 위에 앉아서 삼각대 위의 휴대폰을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미쳤어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앉아 씨의 외침에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 길지 않은 말이었고 문장이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지금 앉고 있는 이 의자는 제 아내인 차미례가 맡았다가 할리데이비슨 아저씨에게 건네주기를 부탁합니다.”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를 듣던 날 나는 알 수 있었다. 앉아 씨를 클린하우스에서 갖고 오던 날, 머리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던 순간이 나의 뇌혈관에 무언가 박히던 순간이었음을. 그리고 그 무언가로 인해 내가 사물들의 정령과 소통할 수 있게 됐음을. 내 몸 안에 들어온 이물질을 빼내면 나는 살 것이고, 품고 있으면 나는 죽을 것이었다. 내가 살면 앉아 씨는 사라질 것이었고, 앉아 씨가 살면 내가 죽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