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할리데이비슨과 강냉이
“아, 근데 여기 뭐 하는 데요?”
후줄근한 라이더 복장을 한 50대 후반에서 60대쯤 돼 보이는 아저씨였다. 다소 말랐지만 건장한 체구였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었다. 눈빛은 맑고 깊었다. 하지만 내쉬는 호흡에서 술 냄새가 확 달려들었다.
아, 전혀 모르는 사람 같지는 않고.....동네 아저씨는 아닌 것 같고......누구지......
출입문 유리창 밖으로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가 보였다.
설마 이 아저씨의 오토바이?
그런데 그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 뒤로는 작은 수레가 연결돼 있었고, 종이박스들과 잡동사니들이 빼곡히 실려 있었다. 할리데이비슨과 폐지수거 수레? 참으로 이상한 조합이었다.
“커피도 팔고요, 피자랑 파스타도 있고요. 와인이랑 맥주 같은 것도 있어요. 팔 수 있는 건 다 팝니다.”
내 목소리와 인상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으음. 하우스 와인도 있나요?”
의외의 주문이었다.
“네. 한 잔 드릴까요?”
“그래요. 아니, 한 병? 아니, 그냥 한 잔만 마십시다.”
그러면서 그는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가게 안을 이리저리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독백처럼 툭 내뱉었다.
“참 따뜻해요!”
지금은 여름이었다. 혹시 손님인 자신을 대하는 쌀쌀맞았던 내 태도를 비난하는 말인가?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말로 가게 분위기가 좋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후자일 테지만, 정체 모를 사내가 하는 말이어서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와인을 따르는 나에게 아내가 다가왔다.
“뭐하는 사람이야?”
“모르지. 술 마시기는 했는데, 진상 손님 같지는 않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래?”
아내는 미심쩍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내에게 말을 안 했지만 그에게는 묘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뭔가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 같은 힘이 있었다.
“근데 저 아저씨 오토바이가 할리데이비슨인데, 폐기수거용으로 써. 놀랍지 않아?”
“더 놀라운 건, 오토바이 운전하는데 술을 달라고 한다는 점이지. 너는 그걸 또 팔고 있고! 괜찮겠어?”
“그러네? 근데 이미 전작이 있는 거 같아. 못 판다고 해야 하나?”
그 순간 손님들 몇이 우루루 몰려 들어와서, 피자는 뭐가 잘 나가는지 음료는 뭐가 잘 어울리는지 혼을 쏙 빼놓았다. 응대를 하는 동안 잠시 와인 잔을 바 옆으로 밀어놓았다. 그러는 사이에 할리데이비슨 아저씨가 다가와 냉큼 와인 잔을 들고 자기 자리로 사라졌다. 음료를 서빙하고 피자를 굽느라 할리데이비슨에 대한 생각을 놓쳤다. 30여분이 지났을까. 그 아저씨가 빈 와인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시고 갑니다!”
설거지하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와인은 어떠셨어요?”
“으음. 좋았어요. 너무 무겁지 않은 게 입가심으로 딱이더군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티가 났다. 와인이라는 술이 사회적으로 특별하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마신 술에 대해 음미할 수 있다는 게 그랬다. 그는 1차로 소주나 막걸리를 마셨을 거고, 2차로 와인 한 잔을 보탰을 것이다. 늦은 오후에 와인 한 잔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자기의 기호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 그런데, 이렇게 술을 드시고 오토바이를 운전하시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는 나가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그럼 술을 좀 깰 겸 좀 더 있다 갈까요? 에스프레소 한 잔 줘요.”
그는 오래된 낡은 가죽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를 했고, 책 선반으로 성큼 다가가서는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이 책, 좀 볼 수 있어요?”
뱅크시의 작품을 모아 놓은 책이었다. 뱅크시는 국내에서는 그래픽 아티스트로 널리 알려졌고, 자칭 예술 테러리스트였다.
“원래는 구매 후에 읽으셔야 되는 데요, 조심해서 보세요.”
나는 후하게 인심을 썼다. 아내가 눈을 흘기는 게 뒤통수로 느껴졌다.
내가 에스프레소를 갖고 갔더니 뱅크시 책은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는 어느새 다 본 것 같았다.
“우리 사장님은 참 좋은 눈을 가졌어요.”
“아 여기 있는 책들요? 책 컬렉션은 와이프가 다 한 겁니다. 저는 여기 머슴이에요.”
아저씨는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아니 아니, 우리 사장님!”
그는 아예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네? 저요?”
“그래요. 눈이 참 좋아요.”
기분이 묘했다. 무슨 뜻이지?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도 벌써 노안처럼 뿌연 이 내 두 눈이 좋다고? 눈이 쪽 찢어졌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어도 그 눈으로 칭찬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우리 사장님은 장사할 사람이 아닌데. 장사가 영혼을 갉아먹어요!”
젠장! 이건 또 뭔 헛소리래. 누구 염장을 지르나! 대한민국에서 자영업자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그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인데. 누군들 좋아서 이 짓을 하고 있나!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이나 팔아먹은 죄로 자영업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의 뚱딴지같은 한 마디에 나는 그에 대해 품고 있던 지금까지의 선한 인상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눈으로 고른 것들은 다 빛이 날거요. 마치 돌 속에 금이 숨어 있듯이 말이오. 하하하!”
그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뭔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향하고 있는 것은 선반에 놓인 크로키용 사람 모형이었다. 그는 이제 볼 일이 다 끝났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서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오토바이에 능숙하게 올라타고서는 시동을 걸고 망설임 없이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가리킨 사람 모형 역시 주워온 것이었다!
아, 오늘따라 왜 이러지?
지하에서는 의자 귀신이 나를 홀리더니 지상에서는 정체 모를 오토바이 아저씨가 나를 또 잡아 흔들고 있다!
그는 창밖을 오랫동안 쳐다봤고, 그 사이에 손님들이 또 우르르 들어와 이것저것 주문을 해댔다. 아내와 나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할리데이비슨 아저씨가 사라졌다.
그가 마신 찻잔을 정리한 후 뱅크시 책을 들었더니 하얀 봉투가 하나 놓여있었다. 혹시나 해서 밖으로 나가봤으나 역시 그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봉투를 조심스레 열어보니, 미술 전시회 초대장이었다.
<변하기 작품전 : Twice & More>
누구를 초대하는지 적혀있지 않은 무료전시회 초대권이었다. 재생용지에 판화로 인쇄돼 있었다. 꾸미지 않은 듯 꾸민, 세련된 그런 솜씨였다. 할리데이비슨 아저씨가 깜빡 잊고 간 건지 아니면 일부러 두고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초대권을 다시 한 번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전시회의 내용도, 이 초대장의 주인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놓고 간 것을 알면 다시 찾으러 오겠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운터 한쪽에 놔두려고 걸음을 막 떼는 순간, 할리데이비슨 아저씨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아, 강냉이 아저씨!
3년 전 가출 아닌 가출을 했을 때, 터미널에서 나에게 강냉이를 건네줬던 바로 그 아저씨!
터미널에 앉아서, 어디론가 떠나야만 한다는 강박에 휘둘리고 있을 때, 심지어 그곳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을 때, 그때 마치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무심히 웃으며 강냉이를 건넸던 아저씨. 연민과 동정이 아니라, 공감과 위로의 시선을 보여줬던 그 아저씨. 그 아저씨가 다시 나타났던 것이었다.
내 몸 안에서 바람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