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성의 로맨스(3)
한글장편소설 일대다의 관계에서, 여성 주인공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불화’에서 ‘화합’의 관계로 나아가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게 되는 것일까? 중세의 부부관계에서 여성 주인공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지만 결코 남편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다. 중매에 의해 결혼한 이들은 낯선 남편과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지 않고, 더욱이 애초에 애정 욕망, 특히 성애에서 초월한 존재처럼 그려진다. 유교적 이념과 질서에 토대를 둔 보수적 성격의 한글장편소설에서 여성 주인공은 높은 수준의 유교적 교양을 훌륭하게 함양한 인물로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부부관계에서 규방여성에게 요구된 유교적 교양이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부부관계에 대한 규범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부유별(夫婦有別)’이다. 그런데 부부유별은 부부간 서로에 대한 열정적 몰입을 경계하라 가르친다. 부부유별에 대한 이이(李珥, 1536~1584년)의 글에 그런 지점이 잘 나타나 있다.
“부부 사이에 이부자리 위에서 정욕을 멋대로 푸는 일이 많아 그 위의를 잃고 있다. 부부가 서로 육체를 가까이하지 않고서 서로 공경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이와 같이 하고서 몸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하는 일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반드시 남편은 온화하면서 의리로 통제하고 부인은 순종하면서도 정도로 따라야 한다. 부부 사이의 예의와 공경심을 잃지 않은 다음에야 집안일을 다스릴 수 있다.(夫婦之間, 衽席之上, 多縱情慾, 失其威儀. 故夫婦不相昵狎, 而能相敬者甚少. 如是而欲修身正家, 不亦難乎. 必須夫和而制以義, 妻順而承以正, 夫婦之間, 不失禮敬, 然後家事可治也.)”
이이, 『격몽요결(擊蒙要訣)』, 「거가장제팔(居家章第八)」(이종묵, 『부부』, 문학동네, 2011, 108면에서 인용).
혼인 자체가 가문 차원의 공적인 일이었던 만큼 부부관계에서 중시된 것은 서로에 대한 의무적, 도의적 차원의 문제들로 그것에 해가 될 수 있는 정념, 정욕은 위험한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사대부 남성이야 외정(外情)이나 축첩의 형태로 그들의 애욕을 충족시킬 수 있었고, 이에 공식적인 관계로 예대(禮待)해야 하는 부부 사이의 성애는 절제한 반면 혼외 관계의 성애는 보다 자유롭게 분출, 충족하는 양상이 마련되었다.
반면 일부종사(一夫從事)나 정절(貞節)과 같은 규범은 규방여성에게 오직 남편과의 관계에서만 성애를 취할 수 있게 하였는데, 그것마저도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는 규범하에 억압되었으니, 여성의 애욕은 애초에 드러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투기를 죄악시하던 것 역시 여성의 애욕을 억압하는 기제였다. 육체적 관계가 공인된 부부관계에서마저 관능적 관계와 투기가 금기시된바, 양반 여성은 성애와 무관한 존재이기를 강요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적 태도를 잘 갖춘 여성인물이 한글장편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따라서 한글장편소설의 주인공 여성은 애욕이나 투기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다른 여성에게 매료되어 온갖 행패를 일삼을 때도 다른 여성을 향한 남편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 ‘다른 여성’이 온갖 계략을 꾸며 부부관계를 이간질하고 여성 주인공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를 해도 그 여성에게 질투의 감정을 보이거나 화를 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러한 서사에 대해 흔히 ‘처첩갈등’이라 일컬어지지만, 기실 이 갈등은 처와 첩이 직접 갈등하기보다, 첩(혹은 처)이 여성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계략을 꾸미면 남편이 그 계략에 빠져 여성 주인공을 학대하고 내쫓는 등의 부부갈등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상황에서 여성 주인공이 직접 대항하는 대상은 첩이 아니라 남편이고, 갈등의 핵심사항도 남편의 사랑을 다투는 ‘쟁총(爭寵)’이 아니라 남편의 부당한 ‘학대’에 대한 ‘저항’이다.
이들은 패악을 부리는 남편에게 저항하는 중에도 결코 예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법을 지키면서도 남편에게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남편의 폭언과 폭행에 속수무책 당하기 일쑤다. 그런데 여성 주인공은 그렇게 폭압적 상황을 감내하면서도 철저히 도덕적 우월성을 견지한다. 시가에서 아내와 며느리의 도리를 다함은 물론, 남편의 패행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대항할 때는 법도에 맞게 조리 있게 비판한다. 그리고 ‘잠자리 갈등’을 통해 남편에게 저항하며 자존감을 고수한다.
한글장편소설에는 여성인물이 동침을 거부하는 장면, ‘잠자리 갈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수동적 위치에서 저항 수단이 마땅치 않은 여성이 은밀한 차원에서나마 남편에게 행할 수 있는 항거의 방법이자, 여성의 주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수단이 된다.
18세기 소설 <명주기봉>의 현월염은 남편 이기현이 자신을 천하게 취급하며 희롱하고, 창기를 가까이하며 방탕하게 지내자, 그 비례(非禮)를 “더러이 여겨” 동침을 거부하고, <현씨양웅쌍린기>의 윤소저와 주소저, <옥원재합기연>의 이현영이나 경빙희도 남편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천시하며 예를 갖추지 않자 이에 대해 반발하며 잠자리를 거부한다.
이때 이들은 평생 잠자리를 거부할 것을 결심하면서 그것을 ‘수절(守節)’이라 여기기도 한다. 남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남성과 동침하는 것은 훼절과 같다 생각하는데, 여기서 고수하려는 ‘절개’는 단지 남성에 대한 '정조'를 뜻하는 것이 아닌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한 것으로, 인간 보편의 명예로운 삶, 윤리적 삶을 위해 지켜야 하는 ‘예(禮)’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규방 여성의 성적 자결권에 대한 주체적 의식과 함께 도도한 도덕적 우월감을 함께 읽을 수 있다. 동침을 거부하는 일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행위이지만, 남편이 비례한 자이니 비례한 상대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예’를 고수하는 일, 지조를 지키며 윤리적 삶을 사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한글장편소설에서 남녀 주인공 사이 ‘불화’의 원인은 대개 남편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주기봉>의 월성공주는 현천린과 혼인하게 되자 남편을 예대한다. 현천린에게 호의를 갖고 규범적 태도를 보이며 온화하게 순종한다. 그런데 이미 설소저를 사랑하고 있던 천린은 월성공주를 사랑의 방해꾼이라 여기며 첫날밤부터 박대하더니, 점차 설소저의 이간질에 현혹되어 공주에게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월성공주는 천린에게 상처 입고 냉담해지지만 도의적 의무를 저버리지는 않는다. 시간이 흘러 설소저의 악행을 깨닫게 된 천린은 차츰 공주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풀게 되고, 어느 순간 열정적인 사랑에 사로잡힌다. 관계가 이렇게 전개될 즈음엔 천린이 공주를 향한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게 되지만 이미 상처가 깊은 공주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에, 천린이 공주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이때 남녀가 화합의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상호존중에 기반한 인격적 교류’라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여성인물에게 절박한 것은 상대의 열정적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는 태도이다. 결혼 후 남편에게 당한 부당한 일들로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은, 이후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며 열정적으로 구애할 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남편이 감정에 이끌려 패악스러운 행패를 부렸던 상황을 이미 겪었기 때문에, 다시 감정에 이끌려 사랑을 구하는 행위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주인공 여성은 남성인물이 변질되기 쉬운 감정을 앞세워 사랑을 운운하기에 앞서 인격적으로 자신을 존중해 주길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소설 밖 조선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일부종사(一夫從事)가 당연하고, “남편의 직분은 당연히 존중해야 하며, 아내는 낮추어야 한다. 혹 때리고 혹 꾸짖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당연한 것으로 받들어야 하며, 감히 말대답을 한다든가 성을 내어서는 안 된다.”(소혜왕후 한씨, 『내훈』)고 배웠던 규방여성들이 평생의 반려자에게 우선 바라는 것은 변화무쌍한 정념보다 자신을 존중해 주는 일관된 태도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공적 활동이 부재한 규방여성에게 가문 내에서의 인정 욕구는 작지 않았을 것이기에, 부부관계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는 일, 인격체로 존중받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도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초월할 것 같은 사랑의 관계에서조차 남성은 기득한 ‘인격’에 대해 달리 고민할 필요 없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사랑에 빠지면 되었지만,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결여된 ‘인격’을 힘써 주장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감정, 성애를 부차적인 것, 미뤄도 되는 것으로 스스로 소외시켰던 것이 아니었을지. 여성에게 생득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던 ‘인격적 존중’, 그것이 전제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상대와 감성을 나누기 시작하는 한글장편소설의 여성인물에게서 당대 여성들의 번뇌가 읽힌다.
*참고자료
이종묵,『부부』, 문학동네, 2011
소혜왕후 한씨, 이민수 교주, 『내훈』, 홍신문화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