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을 시작하고 첫 채취를 하게 되었을 때는 걱정을 하거나 불안할 새가 없었다. 나는 우리가 난임 부부가 되었다는 처지에 몰두해 있었다.
난임에 들어선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말이겠지만, 우리 역시 ‘임신은 원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줄’ 알았다.
우리는 쭉 딩크 부부였다.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단호했는지, 양가 가족들도 신혼 때만 넌지시 떠보았을 뿐 임신에 대한 별다른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인들 반응이 더욱 격렬했다. 10년 넘게 갑상샘기능항진증을 관리하던 병원 선생님이 그중 제일 가는 인물이었다. 딩크인 줄 뻔히 알면서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아이를 가지라며 진료실에 들어설 때마다 잔소리를 하셨다. 초면에 딱 하나만 낳으라며 그렇지 않으면 나이 들어 서럽다고 재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언과 잔소리의 차이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이를 원하는지 아닌지라고 했던가. 아직 한참 남은 노년을 상상한다는 건, 우리에게 비현실을 넘어 초현실적인 일이었다. 주변의 관심들이 귀찮기만 했다.
주변의 권유를 흘려듣던 우리는 돌연 딩크를 졸업하기로 했다. 나 때문이었다. 몇 년간 경과를 지켜만 보던 다발성 근종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자 병원에서는 수술 후 자궁이 깨끗할 때 될 수 있으면 빨리 임신을 하도록 권유했다. 근종은 재발 위험도 큰 데다 내 나이가 이미 임신에 불리한 고령이라는 것이었다.
언제라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와 달리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마음이 달라졌다. 임신의 주도권이 나에게서 사라졌다. 승기를 잃은 입장은 초조했다. 조급해졌다.
당시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의 차이도 모르던 우리는 얼렁뚱땅 아이 갖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배란 테스트기도 써보고, 자궁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쑥 팬티도 입어봤다. 임신 잘되는 날도 노려보고, 인터넷에서 찾은 꿀팁들도 두루 시도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불타는 의욕과는 달리 반년 넘게 임신은 되지 않았다.
내 몸의 문제는 알고 있었으니, 남편 쪽 건강 상태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유명한 선생님을 수소문해 진료 예약을 잡았다. 의외로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정자의 운동성과 정상 정자 비율이(3%) 현저히 떨어졌고, 모양 역시 양호하지 않았다. 자연임신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학적 소견이 나왔다.
이후 시험관을 하면서 안 사실이지만, 남편의 정자들은 난자에게 달려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푹 쉬길 즐기는 느긋한 녀석들이었다. 아무래도 주인의 성격을 꼭 닮은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정도 수치로도 시험관을 하면 얼마든지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 다녔던 병원 모두 시험관에 대한 높은 신뢰를 보였다.
우리가 시험관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건, 엄밀히 말해 자의는 아니었다. 결심이라는 표현이 어쩌면 적절치 못하다 생각한 이유다. 떠밀리듯 시작한 시험관 시술은 당황의 연속이었다.
가장 익숙해지기 어려웠던 건 생리 2~3일 차에 병원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생리혈이 나오는 기간에 일회용 치마만 입고 병원 의자에 누워 있기가 부끄럽고 내가 누웠던 자리를 정돈하는 간호사님께 미안했다. 그러나 그 시간에 나를 무안하게 하는 존재는 없었다.
내 첫 채취 수술실 천장에는 라벤더 꽃밭 사진이 붙어 있었다. 몸에 마취약이 돌며 흐릿해지는 시선 끝에 평화로운 풍경의 라벤더 꽃밭이 있었다. 편안히 잠들고 일어나면 아가와 한 걸음 가까워졌을 거라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했다.
난임 생활을 시작하고 솔직히 조금, 아니 사실 아주 많이 서러웠다. 어느 날은 이유 없이 울적했고 어느 날은 희망에 차올랐다. 시험관은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했던 내가 당사자가 되고 보니 채취를 위해 누워 있는 내 모습이 처연하기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험관을 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안쓰러울 때, 작은 시트지에 담긴 꽃밭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그렇게 우리는 둘이 왔지만 셋이 되어 떠나는 날을 꿈꾸며 난임이라는 별에 불시착했고 전에는 몰랐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난임을 통해 작은 배려에 일어서고 큰 일에 대범해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