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케이키 Okeiki Dec 03. 2024

#6. 그 맘 알아요

새로운 차수에 들어가기 위해 또다시 병원을 찾은 아침, 대기실 앞 전광판에 내 이름이 뜨길 기다리는 와중에 한 부부가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서로에게 기대어 붙어 앉아 속삭이는 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얼마 후 기대와 긴장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던 그 부부는 언뜻 봐도 축 늘어뜨린 어깨를 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힘없이 대기실 의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자마자 툭하고 터지던 아내의 울음소리. 그 울음이 얼마나 서럽던지. 말없이 지켜보던 남편의 손이 아내의 어깨를 차마 토닥이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았다. 그저 언제든 아내의 손을 마주잡을 준비를 하며 가녀린 몸에 갇힌 수많은 감정의 물결이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려 줄 뿐이었다. 그들 곁에 있던 나는 어색하게 자리를 떠서도, 아는 체를 해서도 안 됐다. 보고서도 보이지 않은 척 들리면서도 들리지 않는 척, 그들을 둘러싼 배경의 일부처럼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아니 난임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우리는 아니까. 그때 그들 부부는 어떤 이유로 실패했을 것이다. 공난포든 조기배란이든 낮은 수정률이나 수정 실패든, 착상 실패, 화유, 유산 등등 그중 무엇이든 경험했던 우리는 그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안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여잡고 난임 병원을 찾은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더 크게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친절함에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몸 안의 모든 수분을 내보내려는 듯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 그의 눈물은, 예전에 내가 흘렸었고 또 앞으로 흘릴지 모를 것이었다.


위로의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섣불리 행동할 수 없던 그때, 저절로 내 손이 움직였다.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그에게 가방에 있던 티슈를 꺼내 슥 그들 부부 쪽으로 밀었다.


‘그 맘 알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 이래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며 끝없이 고독 속에 머문다고 느낄 때마다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실망하고 절망하고 불안하고 좌절하면서도 포기는 할 수 없다고 외치며 다시금 일어서는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슬쩍 이쪽을 보던 그녀는 꾸벅 목례를 하고서,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


주섬주섬 퉁퉁 부은 눈과 얼굴을 정리하는 손길이 전해졌다. 나는 그들을 감싼 배경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사람을 안쓰럽게 여기지 않았다. 눈앞의 그는 씩씩하게 이겨내는 중이니까. 고요한 병원의 공기를 흔든 그녀를 불편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 역시 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니까.


이따금 채취나 이식을 위해 대기실 침상에 누워있자면, 어디쯤에선가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다. ‘고생했다’고, ‘흠잡을 수 없이 최선을 다했음을 안다’고. 당신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속상하고 슬프고 아픈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다. 그런 감정을 느낄 만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는 뜻이다. 평생 겪지 않아도 되었을 난임의 길에 들어서서 꿋꿋하게 버티고 선 당신은 매 순간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그리고 그 많은 위로와 격려를 나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아니, 그래야 한다.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건 나뿐이니까, 나만은 알아주어야 한다.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못했더라도, 충분히 애썼다고, 수고했다고 실컷 나를 추켜세워 줬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