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키 - 설국의 난임일기
난임이라는 길에 발을 들인 지 벌써 만 5년이 다 되어가건만 여전히 난 처음을 곱씹곤 한다.
‘나는 아니겠지’라는 마음으로 산전검사를 했다. 얼떨떨한 상태로 첫 과배란과 난자 채취, 이식을 마쳤던 시기. 호기롭게 주치의만 믿고 따라가겠다고는 했지만, 당시 남편과 나는 난임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그 시기를 ‘난임 부정 단계’라고 멋대로 이름을 붙여 부른다. 다발성 자궁근종과 갑상선기능항진증, 낮은 정자 활동성, 정상 정자 비율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임신에 불리한 상황이지만, 이보다 더 어려운 조건에서도 건강한 아기를 품에 안은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다.
공연히 희망에 차올랐다. 우리는 금세 난임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순진했다. 시험관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현대의학의 의술이 어떤 장애물이든 거뜬하게 치워줄 줄 알았다. 신선 이식으로 진행했던 시험관 첫 차수는 임신 수치 4점대로 종결됐다. 일말의 여지도 없는 비임신이었다. 그래도 철없이 들떴다. 비록 화유(화학적 유산) 지만 임신 수치를 봤으니 다음번에는 성공할 거라고 스스로를 북돋았다. 짐짓 차분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주치의에게 시험관 성공률을 물었다. 많은 경우 세 번째 차수 내에서 임신을 한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통계 수치였다. 우리에게는 다음 번 아니면 그 다음 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 거라는 주문처럼 들렸다. 야호!
마음이란 일관되지 못하다. 남편에게는 차마 털어놓지 못했지만 차수가 쌓이며 의문이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임신이 안 되는 몸인가?’ 작은 의문이 시간이 지나며 눈에 보이는 결과로 드러났다. 너무나 확실하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학창 시절 노력과 성적이 비례했던 시험과 시험관 과정은 본질이 다르다. 시험관은 이제껏 들인 노력과는 별개로 매 차수 항상 50 대 50, 성공과 실패가 반반의 확률로 초기화된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나는 그 후로도 막연히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며 몇 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와야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시간들을 극복하지 못했다. 내게 극복이 주는 어감은 너무나 고상했다. 내 안에 차오르는 슬픔과 좌절이 눈물과 한숨으로 흘러가도록 버티고 견뎌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니, 몰랐다. 내 나이에 소심해지고, 그간 소홀했던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반성하면서, 스스로 외로워졌다. 그럴수록 임신을 돕는다는 정보들에 귀가 팔랑거리고 지갑도 덩달아 열렸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좋았다. 정해진 시간마다 챙겨야 할 영양제 개수를 늘리고, 식단을 바로잡고, 나보다 덜 절실해 보이는 남편을 타박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 혼자인 채로 내버려뒀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나를 탓했다. ‘주치의조차 무엇이 문제인지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줄 수 없다면, 결국 실패의 원인은 내가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