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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지 Dec 27. 2024

희귀병 가정, 그럼에도 살아가기(완결)

(1)

‘간병 육아 에세이’라는 단어가 기존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대로 글의 장르를 정해두고 브런치에 글을 올린 지 어느덧 두 달이 되었다. 마지막 화를 쓰려고 자리에 앉으니 브런치를 통해 다른 분들과 댓글로 소통하던 시간과 두 아이 모두 희귀병을 진단받고 지금까지 지내 온 2년 반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영상처럼 촤르르 흘러간다.      


2022년 여름, 첫째 아이는 돌잔치를 마치자마자 희귀병을 진단받았고 동시에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딱 일 년 뒤 태어난 둘째 아이 역시 같은 진단을 받았을 땐 넘어진 그 상태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만큼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부정, 분노, 우울, 인정’의 변화를 거쳐왔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두 달 사이에도 아이들에겐 질병과 관련된 여러 일들이 찾아왔다. 어느 날부터 둘째 아이는 매일 새벽마다 저혈당에 시달렸다. 그런 날들이 열흘 정도 되었을 때 119를 부르는 상황까지 왔다. 그날 새벽에도 저혈당이 왔지만, 아침에 씩씩하고 밝은 모습으로 어린이집에 갔다. 등원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린이집에서 아이의 의식이 쳐지는 것 같다고 빨리 와달라는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이런 응급상황을 대비하여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집에 보내던 중이었다. 연락받자마자 곧바로 뛰어가니 3분 정도 걸렸다. 재빨리 달려가 아이를 품에 안았지만 이미 혈당이 34였으며 이름을 불러도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부터 문제였다. 지역 내에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서 구급차를 한 시간 정도 갓길에 정차시킨 후 전화를 돌렸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의 입술은 파래졌고 구급차 안에서 산소치료도 했다. 아이의 희귀병을 진단해주고 지난겨울에 입원 기록까지 있는 대학병원이었지만 ‘오늘은 응급실에 소아과의사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서’ 우리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희귀병이라고, 다른 병원에 가면 대처가 더 늦을 것 같다고, 진료기록을 한번 봐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최초 진단을 내려준 의사가 현재 그만둬서 봐줄 만한 의사가 없어서’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도내 유일의 상급종합병원, 중증질환을 책임지는 권역 공공의료기관, 각종 인증 획득, 우수기관 선정’ 등의 홍보문구가 역겨웠다. 악마가 병원의 탈을 쓰고 의사면허라는 칼을 내게 휘두르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끔찍하고 잔인했다. 다른 작은 병원들은 ‘희귀병 환아를 진료할 자신이 없어서, 응급상황을 대처할 여유가 없어서, 오전 진료 예약이 다 차서’ 등의 이유로 우리를 거절했다. 다행히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직전에 우리를 받아주는 병원이 있어서 진료받을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아이의 ‘새벽 저혈당’은 며칠간 계속되었고 약 3주 만에 컨디션을 회복했다.     


첫째 아이 역시 조용할 리가 없다. 첫째 아이는 워낙 식욕이 없어서 저울에 소량씩 계량한 식사도 채 다 먹지 않는 아이다. (한 끼에 허락된 식사량은 성인 밥숟가락으로 두 수저다.) 그래서인지 늘 혈당이 조금은 낮은 상태로 지낸다. 체육수업이나 대근육을 사용하는 활동을 버거워한다. 조금 걷다가 안아달라고 했다가, 다시 걸어보려고 시도하다가 이내 유모차를 타는 아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장난감이나 유튜브 영상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해서 입에 음식을 한 숟갈이라도 더 넣어 주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모처럼 주말을 맞아 아이들과 기분전환을 하고 싶어서 방문한 카페에서 일이 터졌다. 첫째 아이보다 몸집이 큰 아이가 빠르게 달려오다가 우리 아이와 부딪혔다. 첫째 아이는 피할 틈 없이 그대로 넘어졌고, 얼굴이 시멘트 바닥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입안에서 새빨간 피가 줄줄 나왔다. 금방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아이의 통증이나, 치아 상태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입을 다쳤으니 이제 음식 먹기가 불편하겠지? 정해진 용량만큼 못 먹어서 저혈당이 오면 어쩌지? 새벽에 잠든 아이를 깨워서 특수 전분물을 먹여야 하는데 잘 삼키지 못해서 새벽에 저혈당이 오면 어쩌지? 입원해야 할 상황이 오면 어쩌지? 입원하게 되면 둘째 아이는 누가 돌보지?’ 등 온통 질병과 관련된 걱정이 먼저 들었다. 입술과 잇몸이 아파 물도 마시지 못하고 주르륵 뱉어버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현재의 통증을 걱정해주지 못하는 못난 엄마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갔다. 선물 꾸러미에는 우리 아이들이 먹지 못하는 과자, 젤리, 사탕 등이 가득했다. 아이의 눈을 피해 당류가 적은 대체식품으로 바꿔주려고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이미 커버린 아이가 “이거 말고 누나가 선물해준 과자 먹고 싶어요.”라고 자기 생각을 정확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아마 조만간 자신의 질병 상태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설명해 줘야 할 때가 올 것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여전히 난감하다.      


제주 한달살이를 마치고 남편은 드디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시작했다. 초진은 같이 가달라고 하더니 두 번째 진료부터는 혼자서 잘 다니고 있다. 예상했던 대로 우울 정도는 매우 심각했고 즉시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효과가 미미해서 용량을 두 번 정도 증량했다. 약물의 도움을 받아도 희귀병의 ‘완치 불가’, 늘 마음을 졸이게 하는 ‘저혈당 쇼크’의 위험성, 우리 부부의 ‘만성 수면장애’ 등 변하지 않는 몇 개의 현실은 여전히 그를 괴롭힌다. 정신과 약, 술, 담배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늘 힘들어하는 건 아니다. 마음이 좋은 날에는 먼저 외식을 권하기도 하고, 아이들과 놀러 갈만한 곳을 찾기도 하고, 혼자서 운동을 다녀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날 밤에도 과도를 왼쪽 손목에, 피가 나지 않는다며 더 큰 식칼을 다시 한번 갖다 댄다. 나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그저 안쓰럽다. 그에게 왜 이렇게 정신력이 약하냐, 나는 마음가짐을 많이 바꾸었는데 왜 나처럼 하지 못하냐, 바꿀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긍정적인 것들을 발견하며 이겨내 봐라 등의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시간과 방법이 각자 다르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저 저런 방법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큰 변화가 있다면 삶이 힘들어서 시작했던 휴직 기간을 마치고 직장생활로 되돌아갈 용기를 냈다는 것이다. 처음 계획은 3개월 휴직이었지만 그 시간으로 회복되지 않아 12개월로 늘렸다. 현재 9개월 정도 쉬는 시점이었는데 자신이 스스로 출근해보겠다고 말했다. 사회에 한 걸음 내딛는 모습은 근심이 깔끔하게 회복되어서 사회생활로 되돌아가는 건 아닌 것 같고, 그의 기준에서 일종의 ‘도전’으로 보인다. 그는 아직 혼란스럽기에 다듬어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워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긍정의 무언가가 살며시 피어오르는 것 같긴 하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한 명의 사람으로서 힘든 상황을 기꺼이 이겨내려는 용기를 낸 것이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빛이 이끄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어준 그에게 무척 고맙다.      



(2)

이렇게 우리 가정은 여전히 웃음 안에 근심을 감추며 살고 있다. 그래도 예전만큼 아슬아슬하지는 않다. 그사이에 감사한 손길들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국내에 당원병을 제대로 연구하는 의사는 단 한 명이다. 대부분의 당원병 환아들이 그에게 진료받고 있다. 감사하게도 그는 온라인 상담 채팅 채널을 개설하여 각종 질문에 직접 답변해준다. 특별히 감사한 점은 24시간 언제나 답변해 준다는 점이다. 당원병은 새벽 저혈당이 위험하고, 국내 의료진 대부분이 관리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보호자들이 주로 새벽 시간이나 입원 및 응급상황에 당황하곤 한다. 그런 상황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즉시 연락하라는 취지라고 한다. 세상에 아직도 이렇게 따뜻한 의사가 존재하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정신이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손길에도 감사하다. 두 시간마다 소량씩 자주 식이를 챙겨야 하다 보니 다른 아이들보다 손이 더 많이 가고, 식이 시간을 놓치면 안 된다는 불안함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단체 생활인데 수업 흐름에 방해되는 순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힘든 내색 없이 날마다 우리의 부탁을 잘 들어주시고 아이가 먹어도 되는 간식의 종류, 오늘 음식을 먹은 양, 의심스러운 증상 등을 그때그때 공유해주신다. 아이는 부모 두 명 이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제2의 부모가 되어 함께 키우시는 것임을 알게 됐다.      


감사하게도 이 길을 먼저 가고 있던 다른 환아 부모님들의 노력 덕분에 2023년에 ‘한국 당원병 환우회’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인원수는 적지만 공식적인 조직이 되니 정부에서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2024년부터는 당원병 환자들의 주요 식사인 ‘옥수수 전분’이 정부 특수 식이 지원 사업에 포함되어 구매 비용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지원 비용은 필요한 금액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긴 하다. 환우회 중 80퍼센트의 가정이 아이들 간병으로 인해 부모 중 한 명이 직장을 잃고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한다. 또한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상의 불편함, 새벽의 노고, 몸과 마음의 치료비용까지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원병을 알아보고 관심을 가진다는 자체가 위로되고 힘이 되었다. 이 시기들은 나의 우울 정도가 가장 심했던 때라서 나는 이 결과들을 이루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넘어져 있을 때, 다른 누군가의 노력으로 긍정의 결과가 이루어짐을 경험했다. 관련된 이들에게 무척 감사하다. 앞으로는 내가 힘을 낼 수 있는 범위에서는 어떤 노력이든 흔쾌히 할 다짐으로 2025년 환우회 임원진에 신청했다.      


건강한 음식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사회 분위기 덕에 저당 식품이 계속해서 출시되고 있다. 머지않아 사탕, 젤리, 과자, 음료, 빵 등 다른 아이들이 간식을 먹을 때 우리 아이도 비슷한 모양의 간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한다.      



(3)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게 닥친 상황을 스스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지인들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두 달 전,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지인들도 우리 가정의 상황을 알게 됐다. 그동안 몰랐다고 힘들었겠다고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식사와 커피를 사주며 응원해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 위로와 응원의 손길은 브런치의 댓글과 하트로도 이어졌다. 두 달간의 과정을 통해 ‘우리 가정의 상황을 공개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그동안은 내면에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해서 ‘지인들에게 알려봤자 아이들의 진단을 취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완치되는 것도 아니고, 새벽 간병을 누가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고, 나의 고단함을 줄여주는 것도 아닌데, 슬픈 이야기를 굳이 꺼내야 할까?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부담이 되는 일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개해보니 ‘상황은 바꿀 수 없지만, 내 마음가짐은 충분히 바뀔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결혼 유무, 자녀 유무, 자녀의 나이, 처한 상황 등 모든 조건이 다르더라도 나의 마음에 공감하고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이 세상은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며 나를 응원해 줄 누군가는 반드시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글을 쓰고 읽어주시는 분들과 댓글로 소통하다 보니 온통 흑백으로 보이던 세상이 하나둘씩 색채로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한순간에 변하지 못할 거란 것도 안다. 아무리 환우 가족이 질병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늘 엉망진창이 된 마음이 숨어 있다. 그 마음이 커졌다 작아졌다 할 뿐이다. 그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어쩌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매일 새벽, 어두운 방 안에서 잠든 아이들 얼굴을 내려다볼 때면 ‘이곳은 광활한 우주이고 우리는 반짝이는 네 개의 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반짝이면서 우리의 빛으로 아직 어둠 속에 있는 다른 이들도 비춰주고 싶다. 컴컴한 방 안에서 홀로 방황하고 있는 이가 있노라면 우리의 빛을 흔들어서 ‘우리 여기 있다’라고 알려주고 싶다. 당신도 나도 혼자가 아니라고. 신이 있다면 이렇게 살라는 신호로 특별한 운명을 내게 준 것 같다.      


두 아이 모두 희귀병 진단을 받고선 내 인생은 망가졌고 모든 희망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매일 아이의 시간표를 붙들고 있었다. 시간을 맞춰 아이를 돌보는 일은 내가 정신을 붙들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이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이 덕분에 버텨내고 살아가는 현실이었다. 내 삶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모습이 내 삶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였다. 그런 사람이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나의 운명이었다. 이제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내 힘으로 절대 바꿀 수 없는 ‘희귀 난치질환 환우 가정’이라는 찜찜한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게 됐다. 이제는 내 모습이 슬프지만은 않다. 지난 좌절의 시간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들었던 시간은 역경을 이겨내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 충분히 슬펐고 충분히 아팠고 충분히 울었다. 다 울고 나니 마음이 조금 시원해졌다. 그래서 주저앉은 다리에 조금씩 힘을 줄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내 운명을 인정하고 내 삶 그대로를 사랑한다.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반짝이는 생애를 지켜주고 싶다. 아이를 지키는 것, 그건 우리 가족을 지키는 것,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매일 그렇게 살긴 힘들겠지만, 흔들리겠지만, 또다시 넘어지는 날들이 있겠지만 지난날처럼 ‘뚝’ 부러지는 나무가 아닌,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제 자리를 지키는 뿌리 깊은 잡초 같은 날을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도 힘든 상황은 계속 생길 것이다. 나도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고 처음 겪는 상황들이니 당연히 능숙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안에는 가족을 향한 사랑이 분명히 있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제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기까지의 시간이 짧아질 것 같다. 제주에서 매일 바라봤던 바다의 물결처럼, 위로 올랐다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이내 다시 위로 올라가는 파도처럼, 힘들어도 다시 위로 솟을 수 있다는 확신하고 살아갈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저희 가정의 이야기를 읽어주시고 하트, 댓글, 응원 등 마음을 보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번 계기를 통해 더 많은 분과 마음을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 브런치 북을 종이책으로 출간하고 싶은 목표가 생겼습니다. 혹시 나중에 서점에서 만나게 된다면 저희 가정이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 인사로 반갑게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재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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