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아이의 연이은 희귀병 진단, 그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시간 없이 매일 밤낮으로 이뤄지는 전쟁 같은 간병,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심리상태, 네 식구 잘살아보자는 노력과 달리 계속해서 멀어지는 부부 사이.
그런 삶의 끝에서 신혼여행 때의 행복, 그 초심을 찾기 위해 무작정 제주로 도망갔다. 처음에는 잠시 쉬다 갈지, 오래 머무를지, 그게 한 달일지, 한 계절일지, 일 년일지, 정확한 계획이 없었다. 그저 숙소가 한 달 단위로 예약할 수 있어서, ‘한달살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라 익숙해서, 아이들의 주식인 옥수수 전분 통의 부피를 고려해서 등 ‘한 달’이라는 기준을 정한 것이었다. 어느덧 마지막 주가 찾아왔고 우리는 이후의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다. 더 머무를지라도 옥수수 전분을 챙기러 누군가는 집에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비행기를 타는 날까지 두 밤이 남았다.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제주 한달살이라는 멋진 가면을 써도 기적은 없다’라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신은 대답이 없었고, 환경이 바뀌어도 밤낮없는 아이들의 간병 시간표는 변하지 않았고, 마음과 체력 또한 여전히 지쳐갔다. 단 하나의 변화가 있다면, 그동안 새벽마다 아이들을 깨워 전분물을 먹이던 좁고 답답한 안방에서 벗어나 탁 트인 바다와 고요한 시골 돌담길을 보며 내 삶을 대하는 새로운 마음가짐이 조금씩 피어올랐다는 것이다.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은 충분히 바꿔볼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깨달았고 조금씩 연습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아직도 답답하다고 했다. 괴로웠던 마음이 조금은 좋아졌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엔 응어리가 남아있다고 했다. 살던 집에서 제주로 환경을 바꾼 것처럼 제주에서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장소를 이동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야 무엇이든지 해 볼 작정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마음껏 활용해 보라고 모든 결정권을 그에게 줬다. 그는 급하게 한림읍 협재리에 2박짜리 숙소를 구했다.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우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또다시 도망쳤다. 남은 응어리는 서쪽에서 풀 수 있겠다는 기대에서 였을까, 운전하는 내내 남편의 눈은 반짝였다. 무언가 기운이 좋았다.
(2)
설렘을 가득 안고 도착한 곳에선 당혹스러운 장면이 펼쳐졌다. 숙소에 가려면 큰 도로 뒤쪽으로 두 블록 정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진입할 수 있는 골목은 한 개뿐이었는데 하필 도로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좁은 골목길에 각종 공사차가 있었다.
‘우리 차가 저 사이를 지나갈 수 있을까?’
남편이 한숨을 쉬려는 찰나 첫째 아이가 소리쳤다.
“저기 봐요! 포크레인이에요! 포크레인이 땅을 파요!”
안 그래도 멀리서 대략 공간을 파악하느라 머리가 복잡한데 아이까지 큰 소리로 떠들어서 머릿속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우와! 불도저도 왔네요!”
“주원이 포크레인이랑 불도저 실제로 봐서 좋아?”
“우와 진짜 크다~”
아이는 내 말을 듣지 못한 채 계속해서 감탄했다.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같은 상황을 앞에 두고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이토록 다를 수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아이의 순수한 시선이 부러웠다. 나도 그 능력을 갖추고 싶었다. 앞으로는 일상이 힘들지라도 그 속에서 긍정을, 감사를, 희망을, 미래를 찾아보자는 다짐을 했다. 우리 차는 간신히 그사이를 지나갈 수 있었고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협재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했다. 옷이 더러워지고 물에 젖는 것을 꺼리는 부모 때문인지, 아이러니하게도 한 달 동안 섬에 있었으면서 첫 번째 물놀이였다. 집에 돌아갈 날이 두 밤 남았는데 말이다.
(3)
예상대로 새로운 곳에서의 2박 3일은 짧았다. 첫째 날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했고, 셋째 날은 짐을 빠짐없이 챙겨 공항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사이에 우리는 두 번의 물놀이를 했고, 남편과 나는 서로에게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남편은 예전부터 가보고 싶던 맛집에 혼자 가서 아이들의 방해 없이 편하게 식사를 하고 왔다.
내 차례가 되자마자 가까운 카페에 간 후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진한 녹색과 싱그럽고 여린 초록이 어우러진 비양도, 멀고 깊은 파란색부터 고요한 에메랄드가 따뜻하고 투명한 파도가 되어 모래를 적시기까지 여러 겹의 층을 이룬 바닷가, 거기에 한낮의 햇살까지 더해지니 한 폭의 반짝이는 그림 같았다. 그 장면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눈을 살짝 감았다. 눈을 감으니 그제야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파도가 다가오는 소리, 모래를 쓸고 다시 나가는 소리, 첨벙첨벙 물장구치는 소리, 그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웃음소리. 모두 멀리 있는 소리이지만 바람을 타고 내게 왔을 땐 그 행복이 배가 되어 들려왔다. ‘아, 좋다.’ 이것이 진정한 평온이었다. 그 시간은 남편과 바다와 제주가 힘을 합쳐 내게 준 선물이었다. 혼자서 두 아이를 돌보는 것을 힘들어하던 남편이 나에게 이런 시간을 주다니, 그래도 한 달 동안 그의 마음에 무언가 변화가 있긴 있었나 보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찌르르 울리며 눈물이 고였다. 이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가끔 흔들리는 남편을 볼 때마다 이 사진을 꺼내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
(4)
떠나는 날 아침이 됐다. 둘째 아이가 생각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아직 곤히 자는 남편과 첫째 아이를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숙소 밖으로 나왔다. 둘째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후 마지막일지 모르는 협재해변 쪽으로 향했다.
내게 다가왔다 멀어지는 파도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 파도에 모두 흘려보내자. 주변을 돌보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려가던 나의 욕망을. 아이들의 간병이 힘들다며 세상을 향했던 원망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삶을 내 맘대로 재단했던 어리석음을. 절망 속에서 더 큰 절망을 찾아 헤매던 비관을. 제주에 오기 전의 나의 얄팍한 날들을.’
그랬더니 바다 역시 내게 새로운 걸 안겨주었다.
‘지금, 이 순간, 이 감정을 마음에 새기라고. 매일 오후 우리 네 명이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장면을 바라봤던 순간들을 잊지 말라고. 이렇게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바라봐야 하는, 한 팀이라고. 똘똘 뭉치는 것만이 가장 큰 힘이라고.’
이 생각의 끝에 다다랐을 땐 난 이미 엉엉 울고 있었다.
이제는 꼭 제주가 아니더라도, 새롭고 자극적인 조건이 아니더라도, 살던 집에서 쳇바퀴 굴러가는 일상일지라도, ‘살아 볼 만 하겠다’라는 자신이 생겼다. 어차피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갈 것이라면 너무 멀고 촘촘한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모든 길은 이어질 거라며 지도를 켜지 않고 순간을 즐기며 천천히 골목길을 산책했던 것처럼, 아이에게 오늘은 어디 가고 싶냐고 물으며 하루 이틀의 계획만 세우며 순간의 행복을 누렸던 날들처럼, 내 인생도 그저 시간의 흐름에 맡겨보기로 다짐했다. 카르페디엠. 너무 먼 미래를 신경 쓰느라 현재의 행복을 놓치지 말고, 오늘 하루를 온전히 누리며 살려는 마음이었다.
(5)
아침 식사를 간단히 챙겨 먹고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갔다. 한 시간 정도의 비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두세 시쯤이었다. 한 달 전 떠나기 전 말끔하게 청소해두고 간 그대로였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보는 장난감에 잽싸게 달려들었고, 거실은 금세 어지럽혀졌다. 하루 이틀 전의 모습이라고 할 만큼 너무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 달 동안 이 공간을 떠나있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꿈이었을까? 울고 웃는 사이에 단단해지고, 성장하게 된 무척 좋은 꿈이었다.
남편을 꼬옥 안아주며 말했다.
“여보, 고생 많았어. 이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시작해보자. 우리 잘살아보자.”
그날 새벽에도 여전히 알람을 끄고 일어나 간접 등을 켜고 전분물을 준비하여 아이들 입에 물렸다. 단 하루도 쉴 수 없는 간병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것을 힘들다고만 여기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이 낮에 주는 애교도 있지만, 밤에만 느낄 수 있는 것도 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온몸의 긴장을 푼 채 새근새근 자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차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모습을 24시간 동안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기로 했다. 아이들의 예쁜 모습을 많이 볼수록 더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더 든든하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난다.
바퀴 네 개 중 두 개가 빠진 낡은 파란색 버스,
손가락 발가락이 다 부러져 뭉툭해진 작은 티라노사우르스,
원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색이 바랜 브라키오사우르스,
찢어지고 또 찢어져 투명테이프를 몇 바퀴나 칭칭 감아 두른 소방차 스티커,
세탁기와 건조기 속에 셀 수 없이 들어가 부드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친 털의 토끼 인형.
아이는 종종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나에게 양보했다.
이제는 나도 가족들에게 나의 무엇이든 떼어 줄 준비를 마쳤다. 우리는 한 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