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 한달살이를 시작할 때 첫째 아이는 세 돌이 되지 않았고, 둘째 아이는 돌이 채 되지 않았다. 둘째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형아와 ‘1+1세트’처럼 끌려다니는 존재였지만 고맙게도 모든 새로운 순간마다 눈을 크게 뜨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변을 탐색했다. 우리의 일정은 주로 첫째 아이를 기준으로 정해지곤 했다. 제주에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된다. 처음에는 관광 도시에 왔다는 흥분에 휩싸여 유명 카페나 음식점을 먼저 찾았다. 절반은 ‘노키즈존’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대기 줄을 길게 서야 해서 아이들의 식이 시간표에 맞출 수 없었다. 경험이 쌓이자 우리 가족만의 패턴이 정해졌다. 우리의 취향에 맞는 관광지와 식당을 몇 군데 정해둔 후 날씨와 기분에 따라 같은 곳을 여러 번 방문하여 그곳을 충분히 즐기는 식이었다.
첫째 아이는 매일 아침 기지개를 켜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어디 가요?”
“주원이는 오늘 뭐 하고 싶어?”
“상어 집에 가고 싶어요!”
그렇다면 그날은 아이의 목적을 이루어주기 위해 바다 동물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날이다. 날씨에 따라 진짜 바다가 될 수도, 실내 물고기 카페나 대형 수족관이 될 수도 있다. 그동안은 항상 내가 먼저 짜놓은 일정표를, 내 취향대로 선택한 그림책을, 남들 다 한다는 학습 교구를 사서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건네곤 했다. 한 달 동안 “주원이가 하고 싶은 건 뭐야?”라고 아이의 의견을 먼저 묻다 보니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이것은 아이를 한 명의 인격체로 받아들이며, 아이 관점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서 지금까지도 꽤 맘에 드는 습관이다.
아이들의 희귀병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 입장에서, 내 감정이 앞서서, 내가 먼저 소극적인 자세로 주변에 선을 긋고 지내왔다. 하지만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자신들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쩌면 나보다는 긍정적인 태도로 질병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의 공간을 마련해 두기로 했다. 이 질병을 대하는 당사자는 내가 아니라 아이들 본인임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다.
(2)
과일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열대과일 농장에 갔을 때였다. 농장 입구 잔디밭은 유치원에서 소풍을 왔는지 노랑 옷을 입은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첫째는 또래를 보자마자 눈이 반짝였다. 붙잡을 새도 없이 어느새 그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주원아, 이리 와! 형들 노는데 방해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이는 이미 그 무리 속에 섞였고 잔디밭 위 어떤 아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잡기 놀이를 했다.
아이들은 참 신기하다. 서로 처음 보는데도 선입견 없이 금세 어울려 논다. 이름도 나이도 모른 채 또래라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아이를 환영해준다. 그동안 우리 아이가 독특하다는 생각으로 또래 집단에 속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있었다. 우리를 지키려는 일종의 방어였다. 서로 금방 스며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가 만들어낸 편견이 부끄러워졌다. ‘주원아 주호야, 엄마도 이제 그 선을 지울게.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고 너희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만 바라봐줄게.’라고 다짐했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지켜주는 거라며, 너희를 위한 거라며, 그들의 세계에 불쑥 끼어드는 건 어쩌면 나와 아이들을 사이에 보이지 않은 선을 긋고 시작점부터 차별을 두고 시작하는 건 아닌지, 아이들을 한 명의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고, 진심으로 존중하지 않고, 작고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니었을지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아무런 의심도, 거리도 두지 않은 채 자기들의 무리로 자연스럽게 환영해주는 것이 어떻게 이토록 쉽고 자연스러울 수 있는 건지,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엇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같은 무리에 섞여 똑같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직접 보니 마음 깊은 곳이 찌르르 울렸다.
(3)
첫째 아이가 바다 동물을 좋아하고 ‘상어 집’에 놀러 가자는 말을 자주 했다. 매일 오후 광치기해변에 가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도 자주 가고, 대형 수족관과 물고기 카페도 이미 여러 번 다녀온 상태였다. 검색하던 중 ‘제주 해양 동물 박물관’을 알게 됐다. 건물 내에서 다양한 해양 동물을 볼 수 있고 몇 마리의 상어와 물개 등은 실물과 비슷한 크기로 접할 수 있어서 아이가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다. 이곳 역시 남편과 단둘의 일정이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곳이다. 아이가 좋아해 주리라 기대하며 입장했는데 이게 웬걸? 5분도 되지 않아 출구로 나가려는 것이다. 입장료가 아까운 마음에 출구 직전에 있는 퍼즐 코너에 아이를 붙잡아두었다. 효과는 몇 분 가지 않았다. 다시 로비로 나오니 관람을 마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 활동이 있었다. 아이는 그것 또한 협조해 주지 않았다. “다음에 올게요.”라며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입장한 지 10분 만에 나오다니, 너무 허무했다. 돈도 아깝고, 내 마음을 몰라주는 아이가 살짝 얄밉기도 하고, 옆에서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남편의 눈치도 보였다. 당황하고 도중에 아이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던 공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건물 밖에 마련된 숲 놀이터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놀이시설에 알록달록한 물감이 칠해져서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떤 시설에 먼저 올라갈까 고민했다. 미끄럼틀, 징검다리, 외나무다리 건너기, 나무 위 작은 집에 오르내리기 등을 수없이 반복했다. 마치 해양 동물을 보러온 것이 아니라 숲 놀이터를 위해 이곳에 온 듯 보였다.
아이가 내 의도와 달리 박물관을 즐기지 못하고 일찍 뛰쳐나와 ‘아, 망했다. 여긴 우리와 맞지 않아.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불평하며 마음을 닫으려던 찰나, 아이가 그곳에서 다른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랐지만, 행복한 시간을 한참 동안 보낼 수 있었다. 놀이시설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해맑게 웃는 아이는 마치 ‘엄마, 저 나름대로 이 시간을 즐기고 있어요.’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우리 가정에 주어진 질병 역시 ‘내 의도와 다른 것, 내 인생 계획을 망쳐버린 것, 일상을 갉아먹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됐다. 내가 정성을 쏟았던 어떠한 것이 혹여나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그 이면에는 다른 색깔의 빛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자 눈에는 반드시 발견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4)
자연과 동물을 모두 좋아하는 아이를 데려갈 만한 곳은 어디일까? 검색하던 중 ‘목장 카페’를 알게 됐다. ‘목장’이라서 관리된 말을 볼 수 있고, 먹이를 줄 수도 있고, 승마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카페’라서 여느 카페들처럼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할 수 있다. 책이나 유튜브에서 동물이 나오는 장면을 좋아하기에 실제로 보여주고 싶어서 방문했다. 하지만 입장부터 난처했다. 아이는 이곳이 낯설다며 내내 어른들 품에 안겨있으려 했다. 심지어 그 이유는 황당하게도 ‘바닥’ 때문이었다. 어느 부분은 바닥이 벽돌이라서, 잔디라서, 흙이라서 땅에 발을 딛기 싫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방문 때는 말 구경은커녕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조차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날의 아쉬움이 며칠 내내 떠올랐다. 아이를 잘 설득하여 다시 한번 가보자고 했다. 두 번째 방문 때 아이는 시큰둥했지만, 딱히 싫은 내색도 없었다. 남편 품에 안겨있긴 했지만, 말의 가까이 가보기도 하고, 내가 말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며칠 뒤 “엄마가 말한테 당근을 줬지~”라며 아이가 먼저 그날의 장면을 표현해냈다. “주원이는 말이 왜 무서워?” “이제는 안 무서워.” “그럼 주원이도 말한테 당근 먹여줄 수 있어?” “응!” 그렇게 세 번째 방문에서야 아이는 벽돌 바닥, 잔디밭, 흙바닥을 직접 걸어가 말에게 당근을 건네는 용기를 냈다. 그날은 목장 전체 구역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시설을 누볐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가 낯선 장소에 도착했을 때 주위를 탐색하는 시간, 자신이 이 공간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시간, 비로소 부모의 품에서 내려와 스스로 그 공간을 누비는 시간까지 말이다. 부모는 아이를, 아이는 자기 자신을 기다려줘야 한다. 아이들의 질병을 대하는 나의 마음에도 역시나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두 아이의 연이은 희귀병을 인정하는 시간, 한순간에 뒤바뀐 일상에 적응하는 시간, 이 모든 것이 하루 이틀의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평생 나의 인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 말이다. 내가 나를 기다려줘야 했다. 때로는 아이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문득 겹쳐 새로운 깨달음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혼자였다면 이해되지 않았을 것들이다.
(5)
한 달이라는 기간 중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 가족만의 패턴이 정해졌다. 우리는 자연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사람이 붐비지 않는 한적한 곳을 주로 다녔다. 다음 순서로는 각 상황에 부딪힐 때 감당할 수 있는 각자의 용량을 파악할 차례였다. 그 용량은 아무리 부부라지만 각자 달랐다.
‘한적한 자연’을 찾다 보니 제주 내륙에 있는 수목원을 알게 됐다. 우리가 원하는 장소답게 차를 타고 한적한 좁은 도로를 한참을 달려 도착했다. 입장료를 내고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아이는 또다시 바닥이 돌바닥이라며 안아달라고 했다. 남편이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자 아이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이곳에서의 무언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던 나에게 실망스러웠다. 남편은 아이의 반응에 화가 치밀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나서야 했다. 둘째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후 남편과 함께 입구 카페에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열을 식히라며 아이스커피도 주문해주었다. 나는 곧장 첫째 아이를 번쩍 안고 수목원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러곤 아이를 의자에 살짝 앉힌 후 감정을 살폈다. 울음을 그치고 싶은데 잘 안되는 듯이 오래 훌쩍이는 듯했다. 물어보니 자기는 공룡 놀이가 하고 싶었단다. 황당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바로 공룡으로 변신했다. “크와앙~ 나는 숲에 사는 초식공룡이다~” 순간 아이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엄마는 안킬로사우루스 해~ 나는 브라키오사우루스 할 게~”라며 돌바닥 길을 스스로 앞장섰다. 잠시 뒤 내게 부여된 역할은 육식 공룡으로 바뀌었고, 언덕 꼭대기에 올랐을 땐 하늘을 나는 공룡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공룡 놀이를 실컷 하다가, 나무 사이의 터널에서는 동굴 놀이를 하다가, 징검다리가 나왔을 땐 폴짝폴짝 뛰어넘기도 했다. 이후부터 자연이 눈에 들어왔는지 나무와 꽃들의 이름을 묻곤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온 감각으로 수목원을 즐겼다.
우리가 방문한 시기는 애매한 기간이라 계절 꽃도 없고 특별한 주제의 축제도 없이 그저 휑한 시기였다. 그런데도 아이의 시선에서 그곳은 훌륭한 공룡 세상이었다. 아이가 새로운 공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한 용량, 아이의 황당한 심술을 승화시킬 만한 용량을 깨닫게 된 날이었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이 각자 견딜 수 있는 용량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는 도움을 얻었다.
(6)
그 뒤로도 비슷한 상황은 종종 찾아왔다. 어느 동굴에 들어갔을 때도 “엄마, 우린 길을 잃었어. 여기 너무 무서워. 독수리가 나올 것 같아.”라며 울상을 지었다가, “앗! 저기 빛이 보여! 저쪽으로 가보자!”라며 탐험 놀이를 하곤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책의 모험 이야기를 떠올리며 즉흥 상황극에 심취한 것이다. 대형 수족관에 갔을 때는 “여긴 상어 집이야. 우린 바닷속에 들어왔어.”라고 이야기하며, 허공에서 양팔을 휘저으며 “엄마, 저 수영 잘한다고 말해줘요.”라고 했다. 멸치 반찬을 먹을 때는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는 ‘모사사우루스’ 놀이를 해야 했고, 고기반찬을 먹을 때는 육지의 사냥꾼 ‘티라노사우루스’ 놀이를 해야 했다. 아이가 원한다면 나도 기꺼이 상어와 공룡으로 변신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세우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순수한 아이가 부러웠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자기 내면이 같은 것이 부러웠다. 나는 아이들이 희귀병을 진단받은 이후부터 내내 내가 만든 가면을 쓴 채로,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날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이들의 진단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오히려 SNS에는 잘 지내는 척 열심히 포장했다. 이제는 나도 아이들처럼 솔직하고 일관된 태도로, 내게 주어진 세계 안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터득해보기로 결심했다.
위의 모든 과정이 앞으로 내가 ‘희귀병 가정’으로서 정면으로 부딫 힐 일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바탕이 되기를 바란다.
소수 집단이라고 가벼운 취급을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희귀병을 대하는 건강한 사회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한 달 동안 제주에서 지내며 ‘이럴 거면 왜 여기까지 왔지?’라며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아내는 순간도 분명 있었다. 제주에서 찾아낸 빛들이 내 마음속의 어둠을 서서히 밝혀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