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 한달살이 숙소는 신혼여행 때 머물렀던 숙소다. 위치가 서귀포시 성산읍이니 근처에 유명 관광지가 많다. 남편과 단둘이 왔을 때는 성산일출봉 정상까지 올랐다. 우리의 체력으로 단숨에 오르진 못했고 중간에 쉬면서 심호흡도 하고 발아래 펼쳐진 풍경도 살피고 사진도 찍으며 쉬엄쉬엄 올랐다. 정상에서는 거대한 분화구를 바라보며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만끽했다. 심지어 경외심까지 들었다. 멋지다는 단순한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경관이었다. 그 순간 바람이 거세도 좋았다. 이슬비가 살짝 내릴락 말락 하는 불안감마저 여행의 묘미라며 흥겨워했다.
다음 순서로는 근처의 섭지코지로 이동했다. 조금 전 예상됐던 이슬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접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관광지라서 거친 바람도 합류했다. 나는 봄과 가을에 입기 알맞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 있는 끈을 아무리 조여도 코트 밑자락은 활짝 펼쳐진 채 위쪽으로 휘날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도 좋았다. 사랑하는 이와 이런 순간까지도 함께 한다는 마음에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그때와 달리, 일주일간의 제주 신혼여행보다 훨씬 긴 한 달이라는 기간을 머무름에도 이런 날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오니 날씨가 중요했다. 비나 바람이 있는 날엔 실내로 방향을 돌렸다. 그 이전에 전분물을 마시는 식이 시간표가 제일 중요했다. 둘이 왔을 때는 날씨와 붐비는 관광객, 아니 시간과 메뉴조차도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 없었는데 아이들과 오니 모든 것이 걸림돌이었다. 어른을 위한 관광지를 방문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끔 내가 바라던 멋진 장면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1분도 기다려 주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곤 했다. 조금 더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은데 다음 식이 시간이 다가와서 맘 편히 구경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니 식이 시간표에 맞추어 적당히 관광하는 습관만 쌓여갔다.
(2)
제주에서의 기간은 첫째 아이가 희귀병을 진단받은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왜?’라는 질문에 한참 침잠해있던 시기였다. ‘왜 우리 가정에, 왜 우리 아이들에게, 왜 두 아이 모두에게, 왜 나의 삶에 이런 일을 주었는가?’라는 질문을 신에게 돌리던 중이었다. ‘신이 우리 가정을 지켜 보고 있을까? 보고도 숨어 있는 걸까? 혹시 신이 너무 바빠서 아직 우리 가정을 못 본건 아닐까? 어쩌면 신은 처음부터 없는 걸까?’ 등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매일 밤, 대답이 없던 신을 제주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다. 신에 대한 마지막 애정을 가지고 제주에서 오랜만에 교회에 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 주에는 숙소 근처의 역사가 오래된 교회를 찾았다. 세 돌, 돌이 되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라서 본당에 들어가진 못했다. 그보다 한층 위에서 유리창을 통해 본당을 내려다볼 수 있게끔 마련된 자모실(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여러 장난감과 과자 부스러기가 발에 밟혔다. 유아 동반 공간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곧 본격적으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고요한 분위기에서 경건한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공간의 모든 어른은 예배와 관련 없는 주제의 대화를 계속 이어갔고 자녀들의 장난에도 주의시키지 않았다. 기도 순서에도, 찬양 순서에도 그들의 목소리까지 합쳐져 그저 소음으로만 느껴졌다. ‘이건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닌데. 그냥 지금 나갈까? 아니야, 마음 한편에서 조금은 신을 그리워했잖아, 만나고 싶어 했잖아. 이 지역 주민처럼 보이고 기존부터 다니던 교인처럼 보이는데 조금 지나면 조용하게 예배에 참여하겠지.’라는 생각이 내면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방황했다. 곧이어 우리 아이와 다른 아이가 같은 장난감을 서로 먼저 가지고 놀겠다고 우기며 다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아이의 부모는 당류가 가득한 사탕과 초콜릿을 건네며 우리 아이를 달랬고, 우리 아이는 먹고 싶다며 그 포장을 벗겨달라고 보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즉시 그곳을 빠져나왔다. ‘신이시여, 우리는 아직 서로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군요.’
두 번째 주에는 제주에서 건축물로 유명한 관광명소이자 일요일에는 관광을 금지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았다. 앞쪽에는 바다, 뒤쪽에는 산이 펼쳐져 자연을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도 만족스러워하는 외관이었다. 이번 자모실에는 우리 가정만 있었다. 가방에 챙겨온 아이들의 놀거리를 바닥에 펼쳐준 후, 본당에서 진행되는 예배 모습을 전달해주는 화면을 바라봤다. 조용히 예배를 드려볼 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아이가 그 상황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한 시간짜리 예배는커녕 10분도 버텨주지 못했다. 마음속에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럼 그렇지. 예배는 무슨. 신은 무슨.’
제주에서 더 이상의 예배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신이 어디에 숨었나 찾아 헤매었는데, 이제 알았다. 제주에도 신은 없었다.
(3)
당원병 간병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식이요법. 그중에서도 새벽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일부러 깨워서 전분물을 억지로 먹여야 하는 순간이 가장 힘들다. 아이 처지에서도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부모가 흔들어 깨워 입술에 젖병을 물릴 때, 메마른 목구멍에 원치 않는 걸쭉한 전분물이 쳐들어올 때, 당연히 먹기 싫을 것이다. 또한 아직 너무 어린 나이라서 자신의 질병 상태는 물론, 전분물을 마셔야 하는 필요성을 전혀 모르니 더욱 힘들 것이다. 어느 날은 잠결에 본능적으로 마셔 주지만, 대부분 날은 먹기 싫다는 표현을 한다. 잠에 취해 젖병 꼭지를 물지 못할 때도 있고, 혀로 밀어내기도 한다. 어느 날은 입술에 젖병 꼭지가 닿기만 해도 고개를 한쪽으로 휙 돌리고, 양손으로 젖병을 밀어낸다. 그래도 부모는 전분물 먹이는 일을 미룰 수 없다. 아이들 몸속에는 혈당을 조절하는 기능이 없고, 시간이 지체될수록 점점 혈당은 떨어지며, 새벽 저혈당과 저혈당 쇼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발뒤꿈치를 바늘로 찔러 혈당과 케톤 수치를 확인하며 아이를 돌본다. 쏟아지는 잠을 참아야 하고, 깜빡 잠들어 시간이 훌쩍 지나있으면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런 점이 힘들어서 도망친 건데 떠나온 곳에서도 같은 이유로 힘들었다.
어느 새벽이었다. 어김없이 알람이 울렸고, 어둠 속에서 간접 등을 켠 채 미리 계량해놓은 전분 가루를 찬물에 섞어 전분물을 만들었다. 첫째 아이는 정해진 양을 단숨에 마셨는데, 둘째 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5분, 10분, 시간만 흘렀다. 갑자기 옆에 있던 남편이 “XX!”하며 젖병을 집어 던졌다. 그게 하필 둘째 아이의 이마에 맞았다. 젖병은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지며 사방으로 전분물이 튀었고, 아이는 자다가 놀라서 자지러지게 울었다.
남편에게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 어떻게 자기 자식한테 이럴 수 있어? 이유도 모르고 억지로 먹어야 하는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어른이 참아야지!”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니 눈에는 애만 불쌍하냐? 나도 불쌍해! 내 인생도 불쌍하다고! XX! 아, 인생 X 같네!”
아.. 그렇다. 남편의 말이 맞다. 우리도 불쌍한 처지였다. 아이들이 선천적으로 10만 분의 1 확률의 희귀병을 갖고 태어난 것은 남편 탓도, 내 탓도, 아이의 탓도,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냥 희박한 확률로 재수 없는 상황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환자가 가장 힘들지, 보호자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가족이잖아. 부모잖아. 그렇다면 이 정도 희생은 당연한 거야. 아이들에게 이런 원치 않는 운명을 쥐여준 것만으로도 미안한 일인데, 이깟 간병 가지고 부모가 힘들다고 표현하면 안 돼. 힘들다는 감정을 느끼는 건 잘못된 거야.’라고 되뇌며 내면에서 솔직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것은 잘못된 감정이라고, 못된 마음이라고 여기며 내면의 아우성을 외면해왔다.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괴로울 때마다 회피하고 도망가기 바빴다.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이라는 것이 조금씩 사라졌다. 기쁨도, 슬픔도, 힘듦도 느끼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순간 이 모든 주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제야 깨달았다. 남편도 나도 모두 힘든 상태라는 것을.
그날 밤은 너무 길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싫었다. 내가 숨을 쉬며 살아있다는 것조차 역겨웠다. 그리고 슬펐다. 누구라도 붙잡고 엉엉 울고 위로받고 싶은데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아직 우리 가정의 상황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상태라서 말할 사람도 없었다. 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줄 사람은 남편 단 한 사람뿐인데, 그는 조금 전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숙소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두운 방 안에는 울다 지친 아이와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둘째 아이가 방금 마시지 못한 전분물은 더 늦기 전에 반드시 마셔야 한다. 그렇게 발뒤꿈치를 바늘로 찔러 혈당 수치를 확인하고, 젖병 꼭지를 입에 물리기를 시도하기를 반복했다.
다시금 절망과 분노가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밤이었다. 견디기 힘든 괴로움과 통증을 눈물과 함께 삼켰다. 그날 밤도 차오르는 감정을 눌러 담았다. 그러고는 절대 열리면 안 되는 뚜껑으로 단단하게 닫았다. 한때는 어느 신혼부부의 찬란한 순간을 함께한 숙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작고 하찮은 먼지 조각들을 품은 어두운 숙소일 뿐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찾아왔다. 하루의 시작인지 끝인지 모를 재수 없는 태양이 또 떠오른 것이었다.
(4)
식이 시간표는 물론, 한 달 동안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낼 수도 없고, 누구에게 잠시 맡길 수도 없으니 오히려 살던 집에서보다 훨씬 버거웠다. 남편은 단 1분의 자유도 없는 생활에 지쳐갔다. 아이들이 멋지다고 감탄하는 숙소가 남편에게는 비싼 돈 내고 온 감옥일 뿐이었다. 남편의 우울 증상이 다시 심해졌다. 제주에서라도 빨리 진료를 보자고 권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약 대신 술을 마시고 들어오곤 했다. 대신 빨간 눈으로 돌아오는 남편의 손에는 항상 무언가 들려있었다. 처음에는 공룡 스티커, 그다음에는 공룡 장난감이었다. 그래도 마음속엔 온통 아이들 생각이었나보다.
(5)
힘들 땐 한 가지만 생각했다. ‘지친 일상에서 가장 멀리 도망치기.’ 지금 놓인 상황이 사실은 과거의 내가 오랫동안 바랐던 순간이다. 여기서조차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물러설 곳도 없을 것 같았다. 정말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을 것 같았다. 여기에서나마 긍정적인 무언가를 얻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밑져야 본전으로 조금만 더 힘을 내보기로 했다. ‘여행 패턴이 정해지고, 우리 넷의 용량이 정해지면, 서서히 네 명의 손발이 맞아 가겠지. 무리하지 말자. 앞으로도 욕심내지 말고 딱 그 용량만큼만 살자.’
우리만의 속도대로 지내는 동안 우리는 제주의 이상과 현실을 넘나들었다. 어느 날은 ‘떠나오길 잘했다. 제주가 내게 힘을 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가 다른 날에는 ‘아무리 주변 환경이 바뀌어도 우리 가정에 주어진 운명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흔들리는 마음이 거짓은 아니었다. 오히려 솔직함에 가까웠다.
이런 날들 속에서도 나는 SNS에 제주살이의 화려한 모습만 올려댔다. 매일 아침 보던 성산일출봉, 낮에 걸었던 동네 골목, 제주 특유의 돌담, 여유로운 고양이, 바다, 윤슬까지. 그 사진 차제는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글픈 표정으로 올리는 내 모습은 모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숙소 1층의 카페, 걸어서 10분 거리의 카페,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바다, 매일 오후마다 들렀던 광치기 해변. 그것들을 매일 찍어 올려댄 나의 SNS는 겉만 화려한 가면일 뿐이었다. 사실은 힘들 때마다 도망친 순간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SNS 속의 웃고 있는 사진이 내 눈엔 슬픔의 한 조각으로 보인다.
그 시간 들을 통해 깨달았다. 제주에서도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더 이상 현실과 감정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짐했다. 이미 주어진 것들, 현재 닥친 일들, 앞으로 다가올 일들까지 모두, 두 팔을 벌린 채로 고스란히 직면하고 끌어안기로. 우리 가정, 아니 그 전에 ‘나’를 둘러싼 삶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뚫고 지나가는 일, 이것이 나의 역할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제주 한달살이는 ‘기적이나 요행을 바라지 말고, 현실을 직면하고, 인정하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쳐준 쓰디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