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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것들에 대하여

낮은 물질들로 쓰여진 시, 정현 초대전, 청주시립미술관

by 이윤지

(낮은 물질들로 쓰여진 시, 정현 초대전, 청주시립미술관, 2025.05.27.~07.27.)


‘모든 예술은 연결되어 있다. 글, 미술, 음악, 연기 등 표현 방식만 다를 뿐 결국 예술은 하나다.’


이런 생각이 내 안에서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관심은 글에서 미술로 조심스럽게 뻗어나갔다. 그러던 중 ‘낮은 물질’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낮은 물질’이라니.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그 낮은 물질로 만든 작품을 굳이 ‘시’라고 부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의문과 기대를 안고 청주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작가 정현은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다. 국내에서는 사실주의 조각이 정통으로 여겨졌고, 사람의 형태를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하느냐가 중요했다. 정현 역시 이 분야에서 능숙한 실력을 갖춘 조각가였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만난 지도교수는 그의 작품에서 “정확함은 있지만 감수성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조형은 의미가 없다”라는 말은 정현의 작업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조각의 재료와 기법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꿨다. 또한 물질의 시간과 흔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이었다. 첫 번째는 콜타르 드로잉이다. 콜타르는 석유 정제 후 남은 검은 찌꺼기로, 흔히 산업 폐기물로 간주한다. 가격도 싸고 냄새도 강하며 결코 예술적 재료로 여겨지지 않는 물질이다. 그러나 정현은 이 콜타르 안에 침전된 시간과 응축된 기억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버려지고 소외된 물질에 담긴 세월의 흔적을 존중하며 그것을 작품의 주된 재료로 선택했다.

두 번째는 폐목이다. 검게 그을린 나무들은 얼핏 보면 숯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2019년 강원도 고성 산불로 철거된 한옥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 나무는 한때 숲의 일부였고, 사람을 품은 집이었으며, 삶의 무게를 지탱한 구조물이었다. 그러나 산불로 인해 그 쓰임을 다하고 해체되었고, 이제는 검게 그을린 폐목이 되었다. 정현은 이 나무들이 견뎌온 시간과 존재의 무게를 존중하며, 그 위에 한국의 먹을 써서 검은 색채로 표현했다. 불에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있게 남은 흔적처럼 느껴졌다.

세 번째는 침목이다. 침목은 기차선로 아래 깔리는 나무로, 13~15년 정도 기차의 무게를 견디다가 폐기된다. 수많은 철로 위를 달린 무게와 시간, 그리고 그 아래에서 묵묵히 버텨온 침묵의 세월이 이 재료 안에 스며 있다. 작가는 콜타르, 폐목, 침목, 폐철근, 아스콘, 잡석 등을 ‘낮은 물질’이라 부른다. 모두 폐기되거나 잊히기 직전의 것들이며, 그 안에 담긴 삶의 흔적을 그는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정현의 철학은 분명하다. 묵묵히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 물질,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은 것들, 표면이 지워진 존재들에 대한 깊은 존중이다. 그는 그것들의 ‘언어’를 읽어내려 하고, 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어떤 에너지를 포착하려 한다. 그가 조각할 때 깎아내는 대신 ‘쌓는’ 방식을 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표면이야말로 그 물질이 견뎌온 시간과 노동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장소라고 믿는다. 거칠면 거친 대로, 매끄러우면 매끄러운 대로, 깎거나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조형 언어다.


이 전시를 보며 ‘미술은 언어 이전의 표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시간이, 물질의 결과, 표면, 형태의 균열과 무게로 전해진다. 정현은 조각가지만, 동시에 시인이다. 그는 글 대신 나무와 철근, 콜타르와 먹으로 시를 쓴다. 그의 작품은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전시 제목처럼, 그는 지금도 ‘낮은 물질들로 시를 쓰고’ 있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우리에게 말을 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라’고, ‘버려진 것 속에서 남겨진 의미를 읽어보라’라고. 그의 조각은 조형물이 아니라, 세월과 기억, 그리고 감정을 지닌 하나의 존재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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