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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아닌, 나를 들여다보는 일

회화의 고백, 최인선, 네오아트센터

by 이윤지

(회화의 고백, 최인선, 네오아트센터, 2025.06.1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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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마주한 순간, 나는 단순한 미술 감상을 넘어 하나의 정신적 경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작품들은 구체적인 형상이나 서사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응축된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은 강렬한 밀도로 내게 다가왔다. 작가는 말한다. 회화는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기술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층위를 한 화면에 담아내는 것이라고. 이 철학은 그의 작품 전체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가의 작업은 인간 정신의 깊은 사유에서 출발한다. 그는 회화를 단순한 시각적 표현이 아닌, 사고가 예술이 되고 회화가 그 사고의 물리적 몸체가 되는 일상 속의 실천으로 받아들인다.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익숙한 관습과 습관조차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그의 태도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작업 방식이 아닌, 작가의 정신성과 예술 철학을 반영하는 치열한 사유의 결과다. 그는 회화 속에 존재의 무게를 담고, 그 무게를 관객과 나누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1990년대부터 이어온 작업 맥락 위에 새롭게 구축된 추상 회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니멀한 구성과 무채색 계열의 색채는 겉보기에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복잡하고 풍부한 사유가 응축되어 있다. 작가는 사물이나 인물, 사건 등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정과 사유까지 회화 속에 담아낸다. 그것은 단순한 묘사나 상징을 넘어서, 말 그대로 ‘사고를 조각하는’ 행위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요소는 바로 ‘흰색’이다. 많은 이들이 흰색을 무(無)의 상태, 비어 있는 공백으로 인식하지만, 작가에게 흰색은 모든 것이 담긴 충만의 공간이다. 모든 빛이 모였을 때 발현되는 색,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여백. 그의 흰색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에너지와 정신이 가득 찬 공간이다. 이 흰색은 한국 전통 미학과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백의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우리에게 흰색은 순수함을 넘어, 고난을 인내하고 본질을 지켜온 정신의 상징이다.


서구 미니멀리즘이 차가운 절제의 미를 추구했다면, 최인선의 흰색은 따뜻하고 사유적인 공간이다. 그는 흰색이라는 ‘비워진 것’을 통해 오히려 ‘채움’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역설적 충만함이야말로 이번 전시의 핵심을 이룬다. 그의 흰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역시 자기 안의 감정과 생각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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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들을 감상하며 나는 두 가지 삶의 성찰을 떠올렸다. 첫째는 ‘비움의 용기’다.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고 쌓으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때로는 비워야만 채울 수 있고, 내려놓아야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 작가 역시 기존의 회화적 사고와 습관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태도는 곧 우리의 삶에도 깊이 적용된다. 새로운 것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먼저 익숙한 것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존재를 응시하는 태도’이다. 작가의 회화는 인간 존재의 본질, 사고의 생명력, 삶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종종 일상의 바쁨 속에서 삶의 본질을 외면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화면 앞에서는 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이는 나에게도 새로운 사유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예술 감상을 넘어서, 존재와 사유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마주하게 하는 전시였다. 최인선 작가는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화면을 통해 예술의 깊은 본질을 되묻고 있었고, 나는 그 물음 속에서 나 자신의 내면과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의 흰색은 단지 비어 있는 공백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충만함의 상징이었다. 그의 회화는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끝없이 쓰여지는 사유의 언어다.


이 전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삶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존재는 단순하지 않다. 그 복잡함과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내면의 사고와 직관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흰색처럼 비워진 것 속에서 더 깊은 충만함을 발견해야 한다. 작가가 비워낸 그 캔버스는, 결국 관객인 우리 각자의 사유로 다시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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