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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돌프 Oct 19. 2024

4. 남자친구보다 엄마랑 데이트하기 더 어려울 줄이야

X세대와 MZ세대의 동상이몽

 내 첫 남자친구는 99년생 토끼띠였다. 성격도 토끼처럼 유순해서 토순이라고 부르곤 했다. 알바를 하다가 만난 우리는 가게 내에서 입지가 꽤 달랐다. 사장님께 나는 당차고 시원시원한 홀서빙이었고, 그는 섬세하고 착한 주방 보조였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착한 성격 탓에 그의 일이 점차 늘어났다. 주방 보조인 그가 홀에도 나가고, 계산도 하고, 갑작스러운 알바 대타를 떠맡았다. 심지어 보조 역할에 그치지 않고 거의 모든 요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방이 익숙지 않은 스물셋 남자애는 칼에 베이고, 기름에 데었다. 알바 일수와 시간이 늘어나자 보다 못한 내가 일을 줄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기다렸다는 듯 수긍한 토순이는 그때부터 핸드폰을 잡고 끙끙 앓았다. 사장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된다는 것이다.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수를 줄이고 싶은 이유부터 개선되었으면 하는 점을 줄줄 읊어주었다. 예의를 갖춘 말투로 교정까지 해주었다. 문자는 내 입에서 나온 그대로 전송됐다. 연애 초반의 일이다.

 그때부터 알았다. 순한 사람과 연애하면 상대적으로 강인하고 화끈한 내가 결정해야 할 것이 꽤 많다는 걸. 보통 데이트는 내 제안에서 시작됐다. 어딜 갈지, 무엇을 먹을지 등. 놀러 갈 때 예약도 내가 하는 것이 편했다.


 다음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는 달랐다. 꽤 벌어지는 경험치 덕분인지, 야무진 성격 덕분인지 내가 할 일이 줄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묻는 질문에 답하면 예매가 되어 있었다. 방향 감각이 어설픈 나를 최적의 동선으로 이끌었다. 야무지게 후기를 비교해 먹고 싶단 메뉴를 더 맛있게 한다는 식당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당시 나는 데이트 아이템을 제시하는 역할이었다. 구체적인 코스 배치는 남자친구의 몫이 된 지 한참이었다.



    데이트 코스를 짜본 게 까마득한 상황. 하지만 내가 어떤 세대냐. 궁금증이 폭발하는 초등학교 시절엔 네이버 지식인에게, 머리 좀 커가는 중학생 땐 페이스북에. 한참 돌아다니는 고등학생부터 지금까진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시간 꽤나 써본 애들 중 하나다. 학술정보도 아니고 핫플과 데이트 정보라면  챗GPT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해시태그 몇 개면 될 일이다. 이렇게 시작은 야심만만했다. 게다가 상대는 태어난 이래 가장 오래된 친구들이나 다름없다. 1년도 만나지 않은 남자친구보다 23년을 함께한 부모님이 아무래도 편하지 않을까?

 않았다. 두 분 중 비교적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화한 엄마와의 데이트였는데도 말이다.


검색 전 가볍게 질문했다. 엄마가 젊은 애들 노는 걸 궁금해하길래 데이트 갈까 하는데 어딜 가고 싶냐고. 무슨 답이 나올지 예상해 보자. 아마 무엇을 상상하든 그 안에 답은 없을 것이다. 고장군님이 행차하고 싶으셨던 곳은 다름 아닌 ‘황톳길’이었다.

아니, 뭐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는데~ 야, 근데 은주(엄마 친구분)가 그러는데 분당에 황톳길이 있대!
황토 흙 위 걷는 거. 황토가 건강에 되게 좋다고 그르잖아~ 족욕하는 데도 있대.
뭐 그렇다고~ 잘 짜 봐~

 말이 턱 막히던 그때처럼 문장도 꽉 막히지만 애써 이어 나가보자면, 많이 당황스러웠다. 가칭‘ 멋들어진 X세대의 신나는 MZ세대 데이트’ 계획에 황토가 끼얹어졌다. 나의 세포 마을에 폭격이 몰아친 느낌이었다.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늦가을에 차가운 황톳길을 자박자박 걷는 상상을 하니 발이 절로 시렸다. 너무 친환경인 나머지 간혹 가다 지렁이가 까꿍 한다는 후기에 약간 어지러워졌다. 이성세포와 낚시세포 집도 하에 유도신문이 시작됐다. 지렁이를 끼워 던진 낚싯대에 돌아온 답은 허탕.

“무슨 지렁이... 난 그런 얘기 못 들어봤는데~”.

발 시림 이슈를 떡밥으로 뿌려도 허탕. “발이 시리긴 할 거 같아. 낮에 해가 있음 괜찮을 것 같은데, 목욜 낮 기온이 20도에 해가 살짝 있네~”.

강태공의 마음으로 포기할 수 없었다. 흙투성이 맨발로 지렁이의 웨이브를 구경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절대 오해 없으시길. 황톳길에 대한 악의는 없다.)

장군님의 마음을 돌린 건 단풍이었다. 집에 계신 조물주 말고 하늘에 계신 조물주가 날 도우신 건지 나무들이 알록달록 해지고 있었다. 시골에서 자유롭게 자라 특히나 자연을 사랑하는 장군님의 눈길을 돌리기 딱이었다. 때마침 억새와 단풍, 코스모스를 한자리에 모아 축제를 열어주신 하늘공원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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