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속성 효녀가 타오르던 여름휴가
엄마와 아빠는 거의 매년 바다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텐트, 식재료, 갈아입힐 옷, 어린 나와 남동생까지 바리바리 짊어진 채로. 남매의 성장에 따라 두 분의 발목까지 오는 얕은 곳부터 가슴까지 차오르는 바닷속으로 들어가기까지 어언 10년이 걸렸다. 나는 엄마와, 동생은 아빠와 덩치가 비슷해져 이제야 놀만하다 싶어지자 자연스레 가족 휴가는 사라졌다. 첫 번째 이유는 나였다. 나름 수험생인데 그림은 만들자 싶어 처음으로 휴가를 미뤘다. 다들 의외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파에 치이지 않는 휴가는 아주 여유로웠다. 특히 일 년에 한 번 휴가를 받는 부모님께 진정한 휴식이 됐다. 그러다 보니 그다음 해도, 다다음해도 자연스럽게 의견이 모아졌던 것 같다. “내년에 갈까?” 삼 년 동안 세 번의 휴가는 금방 지나갔다. 외식을 하거나 영화관을 갔다가 각자의 방에 늘어졌다. 세 살 터울 동생의 수험생활도 지나갔지만 우리는 집에 머물렀다. 수험생이 없어지자 부모님은 슬슬 바다로 향하려 했지만 남매는 배신했다. 친구들과 노는 게 즐거운 20대들은 더 이상 엄마와 아빠를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작년, 고장군의 선언으로 여름휴가가 재개됐다. 아빠는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휴가 날짜를 맞춰왔지만, 머리 큰 남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생은 굳이 알바 날짜를 조정하지 않았고, 나는 침대 밖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경제활동은 인정한다는 지침에 따라 휴가 인원은 조촐하게 셋으로 결정됐다. 장소와 아이템은 장군님의 선택이었고 그에 따르는 코스 정리와 각종 예약은 당연히 젊은 병사인 내 몫이었다. 거역할 순 없었지만 댓발 나온 입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편하게 쉬자는 볼멘소리는 줄줄 나오는 아이템들에 묻혔다.
짚라인 타고 싶어. 아빠랑 예전에 둘이 남이섬에서 탔는데 재밌더라고. 이번엔 좀 더 길고 스릴 있는 걸로!
튜브놀이도 오랜만에 하고, 액티비티도 하자. 땅콩보트랑 바나나보트 타는 게 소원이었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것도 미적거리는데 짚라인, 튜브, 땅콩보트, 바나나보트라니! 조건도 까다로웠다. 장시간 운전하지 않는 거리, 1박할 수 있는 숙소, 원하는 액티비티를 모두 할 수 있는 코스, 해수욕장, 맛집은 필수. 심지어 휴가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성수기 예약을 따내야 했다. 차라리 차가 식기 전에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게 더 쉬울까 싶었다. 하지만 막내사원이 계약 따오기 힘들다고 사장님에게 투덜댈 수는 없는 법이다. 5분이라도 빨리 예약을 끝내기 위해 밤새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생각하라는 당시 남자친구의 독려가 없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마트에 드러누운 아이처럼. 그냥 세 살 아니고 스물셋 먹고 그럴 순 없었다. 리뷰 없는 여행지는 없고, 온라인 예약 없는 여행지는 드물다. 그리고 그걸 서칭 못하는 20대는 더 드물다는 나름의 자부심으로 모든 예약에 임박했다.
실제로 가족 카톡방(톡방 이름- 윤 씨 셋 고씨 하나)에 보냈던 내용이다. 링크까지 보내놓고 은근히 당일치기 식당, 카페 투어를 다시 어필하는 구질구질함이 보인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기본 기상시간이 12시던 여름방학 어느 날, 아침 8시에 차에 실려 몇 년만의 여름휴가를 떠났다. 볼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크림만 간신히 바른 채 뒷좌석에서 쿨쿨 자다 보니 대천이었다. 나와 달리 밀짚모자를 쓰고 꽃무늬 롱원피스를 입은 엄마는 선글라스까지 장착했다. 힙색을 맨 아빠는 엄마가 입혀준 착장을 그대로 입은 채 속도를 맞췄다. 두 배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두 분을 힘없이 쫓아가는 나는 흡사 달팽이 같았다. 점액 같이 선크림이 섞인 땀을 흘리며 짚라인 건물로 쫓아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와 커플 짚라인에 실려 은근히 무서운 활주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사진을 찍어주는 거의 모든 남자친구들처럼 영혼 없이 셔터를 누르다 지친 나는 도저히 남은 액티비티를 할 수 없다 선언했다. 폭염이었던 날씨에 흐물흐물해진 채 카페에 엉덩이를 딱 붙였다. 이제와 말하자면 살짝 욱했다. 내가 왜 이 날씨에 이러고 있나 싶던 불(속성) 효녀는 스무디와 함께 카페를 떠나지 않겠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조물주는 기꺼이 그러라며 딸내미 눈치를 봤다. 안락한 소파에서 눈으로는 바다를, 손으로는 와이파이를 즐기라고 다독였다. 엄마는 결국 아빠만을 챙겨 바다로 나갔다. 조용하게 바다 멍을 때리자 불효녀에서 물효녀쯤으로 유순해진 스스로가 느껴졌다. 그늘은 시원하니 대여해 둔 썬베드에서 낮잠을 자라는 엄마의 전화에 순순히 나갈 정도였다.
뜨거운 햇살에 살이 구워질 각오를 하고 나선 해수욕장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사람이 많지 않아 한산했다. 높은 층의 카페에선 통창에 막혀 들리지 않던 파도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몰아냈고, 한갓진 그늘이 꽤 컸다. 엄마 아빠가 대여해 놓은 하얀 썬베드는 노란 모래사장 위에 예쁘게 놓여있었다. 문장으로 나열하니 그리워질 만큼 썬베드에서의 낮잠은 달았다. 그거 보라며 좋지 않냐는 말에 머쓱하게 동의하며 은근한 미안함을 전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낮잠 시간을 멈추고 싶지 않은 마음은 별개였다. 튜브를 타자며 꼬시는 엄마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물에 들어가기 위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쾌적한 숙소의 샤워기를 만날 때까지 축축한 소금물에 젖어있고 싶지 않았 다. 어릴 때나 좋았지, 지금은 맑은 수영장 딸린 호텔이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분은 완고한 투덜이 대신 튜브를 끌고 신나게 바다로 뛰어드셨다. 바지만 걷고 뒤따라간 나는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어린 손자들을 데리고 온 할머니 같았다. 한 시간 남짓 파도를 타고 온 두 분의 두 번째 설득이 시작됐다. 어린 우리를 내버려 두거나 함께 탈 수 없어서 구경만 했던 땅콩보트와 바나나보트를 타러 가자고. 3분도 안 되는 시간이 소원이었다는 눈빛을 냉정하게 거절한 딸은 끝끝내 썬베드에 붙어 버텼다. 이미 튜브도 안 탄 마당에 3분 재밌자고 물에 젖기 싫었다. 지금 반대로 생각해 보면 겨우 3분 남짓 함께 하면 될 일인데 말이다.
“뭐가 그렇게 귀찮았을까? 그냥 같이 할 걸 그랬나 봐.”
휴가가 어땠는지 묻는 당시 남자친구에게 엄마 아빠 몰래 한 말이다. 놀이기구보다 재밌었다는 땅콩보트도 같이 타고, 밤산책도 같이 했다면 어땠을까. 부모님은 어린 우리를 바리바리 짊어지고 당연하게 놀러 다니셨는데, 젊어진 우린 왜 부모님과 데이트하지 않을까. 휴가를 다녀온 후 오랫동안 생각했다. 갤러리 속 부모님의 얼굴을 계속 바라봤다. 불만 가득하던 내 얼굴과 달리 온전하게 행복만 한 얼굴들. 기꺼이 그 행복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이 진하게 후회됐다.
그리고 여름의 끝자락에서 행궁동으로 직접 가보니 확고해졌다. 엄마, 아빠와 더 함께해야겠다.
-투덜댈 시간에 예약을 빨리 끝내자.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한다
-썬베드에서 일어나자. 언젠가 엄마, 아빠도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