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데이트는 엉겁결에 시작된다
오늘 어차피 엄마랑 나만 저녁 먹을 거 같은데,
귀찮게 차리지 말고 나가서 먹을까?
-좋지.
뭐 먹고 싶어? 엄마 먹고 싶은 거 먹자.
-너네들 밖에 놀러 가면 사 먹는 거. 젊은 애들 먹는 거 먹어보고 싶어
4인 가족 중 절반이 비어 미지근한 오후, 기계적으로 수건을 개던 내 손이 멈췄다. 눈썹을 씰룩이며 엄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달리 엄마는 옷 개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메뉴였다. ‘젊은 애들이 먹는 거’. 내게 엄마의 메뉴 선택은 수능 한국사 1번 문제만큼이나 늘 뻔한 기출문제였다. 기출 범위는 당연히 도보로 가는 동네 맛집들. 유형은 한식으로 고정이다. 구성은 화려하기보단 단순하게. 뷔페보다는 한 가지 음식 전문점. 모든 공식의 답은 거의 만두전골집으로 수렴한다. 좀 더 얼큰한 게 필요하다면 지체 없이 다음 블록으로 향하면 된다. 우리만의 맛집이라기엔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버섯 미나리 샤브샤브 체인점이 있다. 칼국수로는 면순이인 나를, 볶음밥으로는 밥순이인 엄마를 만족시킨다.
질문과 동시에 답을 예상하던 나는 잠시 멍해졌지만, 곧 침착하게 수건을 마저 접고 대답했다.
그러지 뭐. 그게 뭐 어렵다고.
그러고는 말없이 남은 수건을 개는 것처럼 보였지만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엄마 취향에 맞는 맛집이 즐비한 우리 동네. 이곳에 ‘젊은 애들이 먹는 것’이 있을까? 절대. 엄마가 말하는 메뉴는 내 핸드폰 속에 있다. 정확히는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혹은 내 갤러리.
그 메뉴들을 지금 내 차림새로 먹을 수 있을까? 절대, 절대 아니지. 늘어난 반팔티에 복슬한 수면바지로는 어림도 없는 얘기다. 심지어 잠시 안 감은 머리카락은 곱창 머리끈으로 조선시대 죄수처럼 묶여있었다. 망나니 앞에 무릎 꿇기 일보 직전이었다. 슬리퍼를 끌고 설거지 거리 없는 저녁을 먹으려 했던 계획은 완전히 취소됐다. 다 갠 수건 중 하나를 들고 지체 없이 샤워를 하러 가며 말했다.
“엄마, 씻고 옷 갈아입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시대에서 21세기로 시간여행을 한 나는 소파에서 사정없이 엄지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궁동 #행궁동맛집 #행궁동데이트
엄마랑 둘이 갈 식당을 인스타그램에 검색하다니. 아니 그것보다도 엄마랑 행궁동을 가다니. 행궁동. 일명 행리단길. 수원에서 ‘~리단길(젊은 세대가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의 칭호)’이 거의 유일하게 붙은 곳이다.
인스타그램이 보여준 행궁동의 음식들은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딱 봐도 엄마 입맛에 느끼하고 끈적할 것 같은 양식 위주였다. 혹은 내가 데이트할 때 주로 고르는 아기자기한 일식들. 한식을 사랑하는 엄마가 외면할 게 뻔했다. 네이버로 방향을 틀었다. 외국 애인 인스타그램보다 한국 애인 네이버의 추천이 낫지 않을까?
서칭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한식, 양식, 일식, 중식을 고루 보여준 덕에 꽤 매력적인 퓨전 한식집을 찾을 수 있었다. 익숙함과 새로움을 동시에 줄 수 있는 그곳을 조심스럽게 보여주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퓨전 한식은 처음이라는 말에 의기양양하게 따라오라고 대답했다. 엄마와 단 둘이 하는 외식에 거의 처음으로 화장까지 하고 문을 나서자 꽤나 어둑해져 있었다. 두루뭉술한 메뉴인 ‘젊은 애들 먹는 것’을 구체적인 사진으로 찾아내는데 시간이 걸린 탓이었다. 그 사이 우리 배는 납작해져 있었다. 그 집은 꼭, 반드시, 기필코 맛있어야 했다.